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5939)
[좋은수필]사과는 어디로 갔을까 / 민명자 사과는 어디로 갔을까 / 민명자   사과 옆에 왜 해골을 그려 넣었을까. 풀 세잔의 「해골이 있는 정물」을 본다. 화석처럼 굳어 있던 다락방 풍경이 겹친다. 그 사과들은 어디로 갔을까.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자리에 누워있던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 며칠 사이에 갑자기 병색이 깊어졌었어.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산 사과를 머리맡에 던져 놓았지. 사과는 한동안 다락방에 있었어.' 사과에 대한 기억은 딱 거기까지다. 흑백화면은 다락방에서 정지된 채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을 앞둔 시기였다. 학교에선 수학여행은 말 그대로 수업의 연장이라고 했지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여행지는 경주 불국사, 기차를 탈 기회도 거의 없었을 때이니 기차여행에 대한 설렘과 친구..
[좋은수필]내 빛깔 / 유병근 내 빛깔 / 유병근  제비꽃을 보다가 민들레를 본다. 제비꽃을 볼 때는 오종종한 작은 쪽빛이 마음에 들었다. 민들레도 돌담 아래 자리를 잡고 노랗게 햇빛을 받아먹는다. 돌담 발치에 피는 꽃은 바람막이가 된 돌담에 등을 기댄다.장미처럼 넝쿨을 뻗어나가는 꽃은 가시를 몸에 단다. 함부로 몸에 손을 대지 말라는 으름장이 가시에 있다. 꽃이 탐스럽다고 꺾을 경우 뾰족한 가시로 상대를 괴롭힌다. 숙녀의 날카로운 하이힐 굽도 장미꽃 줄기에 매달린 가시나 다름없는 일종의 무기 아닌가. 날카로운 굽은 또각또각 소리를 하는 걸음걸이의 멋만은 아니다.제비꽃은 피는데 제비는 오지 않는다. 예전에는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 쉬던 수백 수천 마리나 되는 무리였다. 오지 않는 제비를 그리워하는 제비꽃인지도 모른다.제비꽃에겐 돌담이 ..
[좋은수필]길을 잃은 길잡이 / 김기석 길을 잃은 길잡이 / 김기석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군목으로 임관하기 위해 훈련을 받던 시절 독도법(讀圖法) 훈련을 받았다. 나침반 하나와 등고선이 있는 지도 한 장을 들고 제시된 좌표를 찾아가는 훈련이었다. 등고선의 밀도에 따라 산세는 완만하기도 했고 가파르기도 했다. 지도로 보는 세상과 지형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었다. 등고선만 보아도 그 계곡의 모양이 떠오르고, 그곳에 자라는 식물의 종류를 짐작할 수 있고, 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교관들의 설레발이 얼마나 신선했던가. 훈련을 마치고 집결지에 모였을 때 적당히 요령을 피운 동료들은 라면집에서 고단한 몸을 쉬고 있었다. 우리가 온종일 찾아 헤매던 좌표에 대한 해답은 라면집 메뉴판 뒤에 적혀 있었던 것이다. 요..
[좋은수필]著者가 되고 나서 알게 된 것들 / 강헌 著者가 되고 나서 알게 된 것들 / 강헌  글로 밥 얻어먹고 산 지 사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난해 여름, 쉰 중반에 다다른 나는 처음으로 '저자'가 되었다. 영원히 내 이름을 박은 책을 펴내지 못할 줄 알았기에 막상 책이 제본되어 나왔을 때 조금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여기저기 기고하고 연재한 것만 모아도 다섯 권은 내도 벌써 냈겠다고 한심해하던 지인들 얼굴이 하나둘씩 차례로 떠올랐다.첨단의 멀티미디어 시대에 사양산업이나 다름없는 책 한 권, 그것도 베스트셀러 차트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음악 책 한 권 간신히 펴내면서 이 무슨 호들갑이람. 하지만 이 작은 책의 출판 하나에 짧지도 길지도 않은 내 삶 전체의 본성이 요약되어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이 책의 저자 약력에도 썼듯이 내 삶은 '..
[좋은수필]연 밭 소묘 / 최장순 연 밭 소묘 / 최장순  먼 가로수 소실점이 숨긴 길처럼, 내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사는 일 또한 재미없다 싶을 때도 있다. 그런 날이면 걸음은 자연스럽게 연 밭으로 향한다.올여름 유난히 뜨거웠던 마음이었다. 흙탕물처럼 흐려져 바닥이 보이지 않을 것도 같았다. 어느새 달라진 계절이 이곳까지 당도했을까. 만평 연 밭길을 걷고 있으려니 흐린 마음의 바닥이 조금씩 보이는 것도 같다.연 밭이 누런빛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 여름내 발갛게 밝힌 등을 거의 소등한 연 밭은 온통 기도처로 변해있다. 무엇이 저토록 간절할까. 연밥의 무거운 꽃대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갈색으로 타들어가는 얼굴들, 밤낮으로 읊조리던 기도 소리에 성대가 한껏 부어올랐을 연대, 죽으면 죽으리라, 모습마저 결연하다...
[좋은수필]짝퉁얼굴 / 박동조 짝퉁얼굴 / 박동조  나이가 들면 좋은 게 있다. 외모로부터 자유롭다. 나이가 들고 나서 깨달은 건 외모는 인생의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혼기가 닥친 처녀총각에게 이 말을 들려주면 바야흐로 외모가 실력인 시대라는 걸 모르는 소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 젊은 날에는 못난이 인형을 앞에 두고 내 모습이 이럴까 연상하며 고민했었다.내 나이 네다섯 살 무렵, 우리 집에는 시집가기 전인 고모가 둘 있었다. 고모들은 걸핏하면 나더러“코로 숨 쉬어 봐라!”하곤 했다. 나는 어찌해야 코로 숨을 쉬는지, 또 숨이 무언지 알지 못했다.“입을 다물어봐라”해서 시키는 대로 하면“아이고, 그것도 콧구멍이라고 숨을 쉬네."라며 깔깔댔다.고모들이 시집을 가고 나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제사나 명절 때 친정에 온 고모들은 ..
[좋은수필]숟가락 / 최장순 숟가락 / 최장순  수액 몇 개가 링거대에 달려있었다. 기력을 채우기 위한 링거주사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릴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노인의 목에 호스가 꽂혀있고 그 관으로 가족이 유동식을 흘려 넣고 있었다. 숟가락을 놓은 노인의 삶은 죽음 쪽으로 더 쏠린 듯했다.숟가락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도구, 객관화된 일상에서 오직 나만을 위한 주체적인 삶의 행위인 숟가락질, 손가락과 손목 관절이 동원되는 하루 세 번의 노동은 그래서 신성할 수밖에 없다. 아니 거룩하다고 해야 마땅할지 모른다. 기력이 떨어질 것 같으면 몸은 수시로 신호를 보내고, 숟가락의 노동은 바로 시작된다. 식은 방을 덥히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때듯, 숟가락질은 몸에 불을 지피는 의식이다. 때맞춰 비워지는 위胃지만, 그것을 채우지 않고서..
[좋은수필]바람 스치는 소리 / 김선화 바람 스치는 소리 / 김선화   체험이다. 가슴 속 대청마루에 새로운 바람 지나게 할 공간은 인생 도처에 널려있다. 난 지금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서대전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유성의 한 세미나장에서 우리가 수필을 왜 쓰는지 따져보는 시간이 있다고 한 까닭이다.차표를 미리 끊어놓을 새도 없이 분주한 일정을 대충 갈무리하고, 토요일 오후 기우는 시각에 불같이 일어섰다. 이건 순전히 ‘불현듯’이란 기운 탓이었다. 앓아누웠다가도 내 안에서 솟구치는 어떤 소리를 만날 때는 지체 없이 움직여야 하는 게 상책인데, 그것은 거의 직관에서 오는 기운이다. 이 기운이 도진 이상 이것저것 재봐야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럴 바엔 솔직한 내면의 소리에 따르는 방법이 그간의 경험으로 불 때 가장 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