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6030)
[좋은수필]줄 / 이방주 줄 / 이방주  마지막 봉우리에 올라설 때는 밧줄을 타야 했다. 수직에 가까운 바위는 높이가 20cm는 족히 되어 보였다. 고맙게도 누군가 손아귀에 꽉 들어찰 만큼 굵은 밧줄을 늘여 놓았다. 이렇게 갈라진 바위틈을 이른바 '침니'라고 한다. 갈라진 틈이 너무 좁아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더구나 갈라진 바위틈에 발이 끼인 채 잘 빠지지 않아서 한 발 올려 디디기도 어렵다. 때로는 체중을 바위틈에 간신히 지탱하는 발끝에 싣고, 손아귀로 움켜쥔 밧줄을 있는 힘을 다하여 당기며 한 발씩 올라야 한다.아차하면 바로 낭떠러지다. 밧줄을 놓치고 미끄러져 떨어진 다음에 낭떠러지가 의미하는 것은 뻔하다. 그건 죽음이다. 여기에 밧줄이 없다면 어떻게 오를 수 있을까? 그러니 자주색 밧줄은 생명줄이다.어깨가 빠지..
[좋은수필]망해사(望海寺)의 시름 / 이양선 망해사(望海寺)의 시름 / 이양선  지평선을 가르는 바람이 상쾌하다. 도로 양쪽에 핀 코스모스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청명한 하늘 아래 펼쳐진 김제평야는 황금빛 절정을 이루고 있다. 유년의 뜰로 거슬러가는 기분이다. 벼에서 단내가 난다. 알알이 익은 벼 이삭만큼 지난여름 흘렸을 농부들의 땀이 그려진다.머지않아 사라질 가을을 가슴에 담는 사이 심포沈浦가 눈에 들어온다. 군산과 부안 사이의 서해 바닷자락을 낀 자그마한 포구, 우리나라 백합의 팔 할이 생산되는 곳, 백합구이 생각에 입안엔 군침이 돈다.주차장에서 내리자 왁자해야 할 소리가 한가롭다. 손님을 서로 붙들려는 풍경이 썰렁하다. 포구를 따라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해산물 가게 앞에는 해삼이며 개불, 그리고 전복과 다양한 조개를 파는 풍경이 이채로웠다..
[좋은수필]갈매기의 꿈 / 김문호 갈매기의 꿈 / 김문호  갈매기는 천지창조의 돌연변이 인지도 모른다. 가도 가도 바위섬 하나 없는 태평양 일부변경선 언저리의 갈매기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창세기 몇째 날, 새들에게 배정된 영역은 육지의 숲과 하늘이었지 바다와 창공은 아니었으리라.세상 어디에도 둥지라곤 없는 새, 해면에서 잠을 자고 바다에서 살다가 바다로 돌아가는 새. 일망무제의 바다와 무한 창공을 자유 자재하는 갈매기의 유영은 말 그대로 완벽한 자유의 표상이다. 구름 속에 들었는가 하면 눈발처럼 휘날리고, 까마득한 창공에 깃발처럼 떴는가 싶으면 바람같이 해면을 내달린다. 그의 삶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다. 생명을 위협할 맹조류나 침입자도 없거니와 생존을 경쟁할 다른 종족들도 없다. 수평선으로 테두리 쳐진 거대한 궁륭은 ..
[좋은수필]당신의 의자 / 이정림 당신의 의자 / 이정림   우리 집에는 의자가 많다. 혼자 앉는 의자, 둘이 앉는 벤치, 셋이 앉는 소파…. 언제부터 우리 집에 그렇게 의자가 많이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분명 소용이 있어서 사들였을 텐데, 정작 우리 집에는 한 개만 있으면 족하지 않던가. 사람들이 몰려오는 날이면 그것도 모자라 바닥에 내려앉아야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을 때는 그 비어 있는 의자들이 하품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모습이 안돼 보여, 심심한 촌로 뒷짐 지고 마을 가듯, 이 의자 저 의자에 가서 그냥 등 기대고 앉아 본다. 의자의 사명은 누구를 앉히는 것이다. 아무도 앉지 않은 의자는 그냥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비어 있는 의자에 앉힐 사람들을 돌려가며 초대를 해 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
[좋은수필]빈 배에 가득한 달빛 / 맹난자 빈 배에 가득한 달빛 / 맹난자  우리 집 작은 방 벽면에 수묵화 한 점이 걸려있다. 사방이 겨우 한 뼘 남짓한 소품인데 제목은 귀우도歸雨圖>이다. 조선조 중기 이정李禎이란 사람이 그린 그림의 영인본이다. 오른쪽 앞면에는 수초水草가 물살 위에 떠 있고 어깨에 도롱이를 두른 노인이 막대를 비스름하게 쥐고 있다. 간단하면서 격조格調높은 그림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흐르는 강물과 그 위에 배 한 척이면 그것이 실경實景​이 되었건 그림이 되었건 간에 무조건 좋아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한국 문화재보호협회에서 보내준 안내문을 보게 되자 곧바로 달려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잔잔히 흐르는 물살, 그 위로 떠가는 시간. 그러한 강물과 마주하게 되면 이내 서사정 '逝斯亭' 이 떠오르고 그 다음으로는 '가는 자 ..
[좋은수필]노를 품다 / 이치운 노를 품다 / 이치운   배가 밀려난다. 썰물과 하늬바람이 배를 물목으로 몰아붙이면 뱃사람들의 '어기여차' 힘을 쓰느라 소리가 높아간다.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대를 물려 노를 젓는다. 목소리도 물려받는다. 섬에서 노 젓는 일은 일상이다. 섬 아이들은 뭍에서 노는 것보다 바다에서 작은 배를 타고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도시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노는 것처럼 그들은 덴마를 타고 논다. 덴마는 경상도 전라도 방언으로 본래는 전마선(傳馬船)이라 부른다. 배의 크기는 6미터 남짓, 육지로 이동하거나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가까운 섬과 섬을 이동할 때 이용한다. 덴마를 움직이는 것은 서양식 주걱 노가 아니라 전통 노이다. 덴마는 무게가 꽤 나가는 편이라 보트에 사용하는 서양 노로는 배를 움직..
[좋은수필]마음에 주는 글 / 정목일 마음에 주는 글 / 정목일  나는 마음에 드는 글을 써보고 싶다. 글쓰기는 마음과의 대화가 아닐까. 마음은 나와 동일체이지만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내가 편안하고 행복하여야 마음도 그러하다. 어떨 때는 마음과 내가 동떨어진 사이처럼 느껴진다. 마음이 이방인처럼 여겨진다.글쓰기는 독자에게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전하고자 하는 바람일 수 있지만, 먼저 마음과의 소통을 원한다. 마음에 묻은 집착, 이기려는 때와 분노, 억울함, 수치 같은 얼룩, 어리석음이라는 먼지를 어떻게 씻어내고 닦아낼 수 있을까.마음속에 샘을 하나 파두어서 마음을 청결히 닦아낼 수 있을까. 마음의 샘가에 향나무 한 그루 심어 놓고 싶다. 글쓰기는 마음을 닦아내어 편안을 되찾고 맑은 샘물을 솟아나게 하는 일이다​.지식과 정보보다 체험과 자연..
[좋은수필]굴비 / 임만빈 굴비 / 임만빈  굴비는 굽는 냄새를 풍기면서 먹어야 제격이다. 연기 속에 숨어있는 생선 굽는 비릿한 냄새가 에피타이저(appetizer)처럼 식욕을 돋운다. 변변한 반찬이 없던 시절, 굴비 하나를 구워 온 집안 식구들이 밥을 해치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집들이 듬성듬성 떨어져 있어 굴비를 굽는 냄새가 온 집안을 채워도 옆집에서는 눈치채지 못했다.지금의 아파트 생활에서는 다르다.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고 굴비의 참맛을 즐기기가 힘들어졌다. 아무리 환기를 잘해도 굴비 굽는 냄새가 온 집안을 채우고 위층과 아래층으로 번지곤 한다. 이웃들은 비릿한 냄새에 얼굴을 찡그린다. 특히 서양 음식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그런 냄새를 싫어한다. 굴비 구운 냄새가 몸에 배면 학교에서도 놀림 받기가 십상이다.어머니가 도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