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6176)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들꽃처럼 / 이은희 들꽃처럼 / 이은희 단비가 오달지게 내린 날이었다. 아파트 경비실 쪽으로 달려갔다. 혹여 간밤에 내린 비에 섭슬렸을까 녀석의 안부가 궁금해서였다. 화단 귀퉁이에 오종종 피어 나와 오감五感을 일깨운 들꽃이었다. 비를 머금은 제비꽃은 참으로 청초했다. 물기로 꽃잎의 빛깔은 더욱 곱고 찬란했다.제비꽃은 도통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대부분 양지바른 곳 척박한 땅에 피는 들꽃이다. 햇빛과 흙이 있으면 잘 자란다. 척박한 도로 경계석 돌 틈과 절벽 틈새에서도 자라니 생명력이 강한 꽃이다. 나의 눈을 사로잡은 들꽃은 그나마 보금자리가 좋은 편이었다. 얼마 전 경비원이 잔디밭에 가꾸다 군락群落을 이룬 제비꽃을 모두 뽑아버리기가 아쉬워 화단에 옮겨 심은 것이었다.개체 수가 많은 꽃 중의 하나가 제비꽃이다. 지천으로 깔.. [좋은수필]마당 / 연채남 마당 / 연채남 그곳에 서면 남새밭 지나 큰길과 들판이 펼쳐 있었다. 들판 끝에는 계절마다 표정이 다른 '찬산'도 한눈에 바라다 보였다. 봄이면 살구나무 앵두나무 꽃 피어 벌들이 잉잉거리고 찬산의 진달래 꽃물이 내 가슴까지 번질 것만 같았다. 우물이 있었고 외양간 옆에는 삽사리가 혼몽한 눈빛으로 누웠다가는 온몸을 길게 늘이며 기지개를 폈다.널린 빨래도 나부끼지 않던 바람 없는 무더운 여름날에는 피사리하던 아버지도 점심 진지를 드신 후 툇마루에서 목침을 베고 오수에 빠져 있고 바지랑대에 앉은 잠자리도 꿈을 꾸는지 꼼짝을 않았다. 우리들은 날이 저물도록 땟국이 흐르는지도 모른 채 비사치기, 고무줄놀이, 땅따먹기에 여념이 없었다.여름이면 숱하게 피고 지던 꽃들의 향연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봉숭아, 채송.. [좋은수필]죽방렴 / 정성화 죽방렴 / 정성화 영화 '오아시스'가 마침내 베니스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았다. 기쁜 일이고 당연한 결실이다. 내가 그 영화에 대해 진작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남자 주연배우에 대한 기사 때문이었다.'벗은 종두의 가슴이 앙상하다'라는 시나리오의 지문 한 줄 때문에 그는 이 영화를 찍기 전 무려 18kg이나 체중을 줄였다고 했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선악이 공존하는 광기 어린 눈빛을 보이며, 다가오는 기차를 향해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했던 배우다. 자신이 맡은 역에 완전히 몰입하여 우리 삶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그에게서 나는 진정한 프로정신을 느낀다.자신의 일에 열정을 가지고 몰입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감탄스럽다. 천 켤레도 넘는 연습용 토슈즈(toe-shoes)를 신었다는 발레리나 강.. [좋은수필]땡볕 / 박정순 땡볕 / 박정순 휴일 한나절 내내 집안 청소를 마친 뒤 어머니를 따라나선다. 함께 가서 일손 보태달라는 눈치 때문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지난봄부터 특별한 일 없으면 쉬는 날 오우 일정으로 잡히게 됐다.목적지는 집 근처의 제법 너른 공터, 새로 조성된 주택단지 귀퉁이에 다음 단계 공사를 위해 남겨둔 자투리 부이이지, 아무나 사용하라고 버려진 게 아니라는 경작금지 안내판이 서있음에도 극성스런 손길들이 밭두렁 나누어 부쳐놓은 작물이 자라고 있다.가진 문서로 권리 주장할 수 없는 땅이니 먼저 씨앗 묻거나 모종 꽂아놓은 사람의 경작권을 인정해 주는 게 이곳 나름의 관례인데 내놓고 밝히기 뭐 하지만 그 쪼가리 밭 임자 중에 우리 시어머님도 들어 있는 것이다.햇살 미지근해지는 이른 봄부터 시작해, 비늘구름 뒤에서 .. [좋은수필]사이 ㅅ / 박순태 사이 ㅅ / 박순태 바람이 속절없이 불어대는 날이다.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잎사귀들에 눈길이 간다. 잎이 춤을 출 땐 나뭇가지는 배경음악이 되어주고 곡예를 할 땐 신경 줄을 놓지 않으면서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불어오는 바람에 춤을 추는 잎은 무희이거나 곡예사가 되기도 한다. 그 가운데 나뭇가지와 잎은 돌풍과 태풍이 휘몰아쳐도 온전한 동반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그 장면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으려니, 낱말도 나뭇가지 잎처럼 둘이 만나 일심동체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흐르는 내와 그 주변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냇가', 초와 불이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생긴 '촛불' 제사와 날이 후손을 매개체로 하여 생성된 '제삿날', 그리고 나무와 잎이 인연을 맺은 '나뭇잎…….이 중 '나뭇잎'이란 합성어가 .. [좋은수필]기차칸을 세며 / 반숙자 기차칸을 세며 / 반숙자 노부부가 가만가만 풀을 뽑는다. 호미를 쥔 손등에 동맥이 내비쳐 쏟아지는 햇살에 푸르게 빛난다. 올봄 내 몸살감기를 달고 사는 남편은 기운이 달리는지 호미를 내려놓고 질펀하게 내려다보이는 들녘에 눈길을 꽂는다.그 들녘을 가르고 기차가 지나간다. 음성역에 정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을 보니 화물차인 모양이다. 꼬리가 길다. 디젤기관차로 바뀌기 전에는 기차 소리가 칙칙폭폭으로 들렸었다. 언젠가부터 기차소리는 덜커덕덜커덕하다가 요즘은 뿌우웅 한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기차가 지나가는 기차역을 바라보며 일하는 이 언덕에서는 어려서와 마찬가지로 기치는 장난감이다.무료해지면 노부부는 기차 칸을 센다. 하나, 둘 열하나……. 번번이 숫자를 놓친다. 아니 숫자가 아니라 기차 화물칸이다. .. [좋은수필]길베 / 이고운 길베 / 이고운 여인이 붓을 풀고 있다. 오늘 하루도 세상을 다 그렸나 보다. 열두 폭 옥색 치맛자락에 복사물이 번진다. 누굴 만나러, 여인은 저리도 사뿐히 가는가. 잔허리 선을 따라 술 익는 마을로 세월이 넘어가고 있다. 자욱한 연홍사軟紅紗 아래로 저녁 산이 묵향으로 내려앉는다.오늘이 외할머니의 삼우제인데도 어머니는 병실에 누워 있다. 가슴이 답답다 하여 침대를 반쯤 일으켜드렸다. 심한 충격과 스트레스로 급성 췌장염이 생긴 데다 평소에 아프던 곳들이 재발했으니 절대안정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생각나서 눕혀드리려니까 어머니가 힘없는 손을 저었다. 눈이 노을 진 창에 젖어 있다.아흔을 넘기신 외할머니는 노환으로 오래 누워계셨다. 그렇게 맑고 고우시더니 이승의 끈을 놓을 무렵에는 고원의 고사목 같았다... [좋은수필]빗방울 전주곡 / 구활 빗방울 전주곡 / 구활 비가 오는 날이면 쇼팽의 전주곡 15번 '빗방울'을 듣는다. 날씨가 흐린 날에도 '어서 비가 오라'고 그 음악을 듣는다. 그 곡을 듣고 있으면 마음에서부터 비가 내린다. 참 좋다. 비가 오면 조금은 쓸쓸하지만 비가 전해 주는 슬픔이 때로는 따뜻한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좋다.쇼팽의 '빗방울'을 듣고 있으면 슬픈 일도 없는데 피아노 건반 위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괜히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럴 때면 빗물이 타고 내리는 유리창 앞에 선다. 눈도 흐려지고 마음도 흐려져 슬픔은 더욱 커진다. 이별의 아픔을 앓는 사람처럼 외롭고 처량하다. 슬플 때는 유리창처럼 울어야 한다.'빗방울'을 들을 때미다 두 이미지가 겹친다. 하나는 쇼팽이며 나머지 하나는 나 자신이다. 스물여덟의 쇼팽은.. 이전 1 2 3 4 ··· 77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