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일반수 필]개꿈 / 이화련

 

개꿈 / 이화련

 

 

 

그 날은 삼월의 마지막 날이고 금요일이었다. 바로 다음날이 시조부님 기일이어서 오후에 장을 봤다. 과일이며 나물거리를 팔이 늘어지도록 들고 집에 오니 네 시였다. 한숨 돌리려고 거실 의자에 앉았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늘이 말일이구나! 각종 공과금, 신문 구독료 고지서가 차곡차곡 쌓인 채 그대로였다.

뛰다시피 걸었는데도 집 근처 은행에 들어서니 거의 마감시간이었다. 은행 안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줄 서서 공과금을 내고, 간 김에 통장 정리를 했다. 그런데 기계의 화면에 못 보던 문자가 떴다. 빙빙 돌아가는 문자였다. 별로 크지도 않은 글자가 잽싸게 옆으로 움직이는 통에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뒤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는데 오래 들여다 볼 수는 없고 ‘귀하, 휴면, 창구, 문의’ 라는 낱말을 겨우 건졌다. 무슨 뜻인지 몰라도 창구에 문의하라는 소리 같았다.

창구의 직원은 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암호를 풀었다. 그가 완성시킨 문장은 ‘귀하의 계좌에 휴면예금이 있으니 창구에 문의하시오.’ 였다. 나한테 잠자는 예금이 있다고? 그럴 리 없었다.

나는 돈이 많지도 않거니와 내가 알 만한 돈은 그 크기와 성격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근근이 붓고 있는 적금은 나중에 얼마나 탈지 미리 이자까지 따져봤고 열심히 만기를 기다리고 있다. 자립심을 길러 주겠다고 이이들 앞으로 만든 통장의 잔액도 틈만 나면 확인한다. 몇 장 들어 있는지. 그 정도는 안 보고도 알고 애 지갑의 것은 동전까지 헤아린다. 잡자는 돈이 있을 리 없다.

남은 돈이 있기는 있을 거라고, 확인해 보겠느냐고 직원이 물었다.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그만 책상을 정리하고 싶은 듯 손놀림이 분주했다. 앞문에는 벌써 셔터가 내려오고 은행은 종례 직후의 교실처럼 어수선했다.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바쁜 사람 괜히 귀찮게 하지 말자, 그냥 발길을 돌렸다.

은행을 나와 서너 걸음이나 옮겼을까. 아니다 싶어 아직 닫히지 않은 옆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까 그 직원에게 통장을 내밀었다. 컴퓨터로 알아보면 금방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자판을 두드리며 아가씨는 자꾸 고개를 갸웃거렸다. 통장을 들고 뒷줄에 앉은 다른 직원에게로 갔다. 무언가 물어 보는 듯했다.

자리로 돌아온 직원의 표정이 좀 딱딱했다. 웃음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얼굴로 나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주민등록번호를 물었다. 그쯤은 쉽게 외울 수 있었다. 이어서, 혹시 순천에서 살았던 적이 있느냐고 했다. 순천은 아니고 그 옆인 광양에서 살았었다고 했더니, 그럼 국민은행 순천지점에서 통장을 만들었냐고 물었다. 만들었지만 오래 전 일이라 지금은 그 통장이 없다고 순순히 털어놓았다. 다음 질문은 이름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가진 두 개의 이름 가운데 나머지 하나를 대보라고 했다. 거기에서 그만 꽉 막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또 다른 내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내 이름이 하나가 아니었던가.

이름 끝 자인 ‘련(蓮)’이 문제였다. 서류 따위를 만들 때 ‘련’이라고 불러줘도 한자면 보고 ‘연’이라고 적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 순천의 은행에서도 그랬던 모양이다. 이름에 대한 의문이 풀리자 직원의 표정도 풀렸다. ‘이화연’의 옛 통장에 잠들어 있는 돈을 깨워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깨워보니 한두 푼이 아니었다. 자그마치 일백칠만 원! 잔돈 칠천칠백사십 원까지 몽당 찾아 손에 쥐니 흐뭇했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상금이라도 탄 양 뿌듯했다. 간밤에 돼지꿈이라도 꾸었느냐는 말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돼지꿈이 아니라 개꿈 꿨어요!

전날 밤에 난이 꿈을 꾸었다. 그게 생각나 다시 은행으로 들어간 것이다. 난이는 우리 집에 살던 개다. 내가 먹는 건 수박이든 커피든 다 먹으려 들고, 찐 옥수수를 무척 좋아해 앉은자리에서 두 자루도 모자랐다. 겁이 많아서, 으슥한 데를 지나게 되면 저는 슬며시 뒤로 빠지고 나를 앞장세웠다. 불 앞에서는 더 섭섭하게 굴었다. 내가 낙엽을 태우느라 마당에 불을 피우면 피신하기 바빴다. 멀찌감치 대문 밖에서 지켜보다 불이 다 꺼진 뒤에야 들어왔다. 옛날에 어떤 개는 술 취해 잠든 주인을 지키기 위해 제 몸에 물을 적셔 불을 끄다가 지쳐서 죽기도 했다던데--- . 그래도 정은 많아 내가 안 보이면 밥도 굶고 슈퍼마켓으로 은행으로 찾아다녀 동네 사람들이 ‘효녀 났네’하며 놀리곤했다.

죽은 지 칠 년이나 되었건만 지금도 가끔 그 개가 꿈에 보인다. 꿈에 난이를 만나면 돈이 생긴다. 대개 강사료나 원고료처럼 미리 알고 있던 돈이고 액수도 소소하지만 전혀 생각지 않은 돈일 때도 있다. 신발이나 사 신으라고 동생이 내게 모처럼 선심을 썼을 때도 같은 꿈을 꿨다. 그렇지만 백만 원이 넘는 돈은 처음이었다. 금액이 금액인 만큼 꿈이 다른 때와 좀 달랐다. 난이의 달인 ‘진주’까지 나타났다. 죽었다고 해서 땅에 묻었는데 흙을 밀치고 되살아났다. 둘 다 살이 통통하고 털이 반질반질했다.

십여 년 전 포항으로 이사하면서 통장을 정리할 때 하나가 빠졌는데 모르고 있었다. 그 통장에 적지 않은 돈이 있는 줄은 더욱 몰랐다. 공돈은 아니지만 까맣게 잊고 있다 찾았으니 횡재한 지분이었다. 나는 난이 묻을 때 다음 세상 가는 여비 하라고 겨우 오백 원 동전 한 닢 넣어줬는데 난이는 통도 크다. 백만 원도 선선히 찾아준다.

그 돈 절반을 뚝 떼어 영덕 대게를 먹었다. 대게는 혼자 먹어도 맛있고 여럿이 먹으면 더 맛있다. 혼자 먹으면 친구들이 생각나 목에 걸리고, 여럿이 먹으면 지감이 신경 쓰여 목에 걸린다. 먹기 영 힘들었는데 돈 생기는 김에 친구들 불러 실컷 먹었다.

‘만약에 백만 원이 생긴다면’이라는 흘러간 노래가 있다. 노랫말을 보면 그 꿈 같은 돈으로 살 것도 많고 할 것도 많다. 나도 ‘어디서 백만 원쯤 굴러들어왔으면’ 하고 달콤한 공상에 점긴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걸 먹어 없앴다. 안 되겠다. 난이 꿈을 한 번 더 꿔야겠다. 돼지꿈까지는 필요 없다. 나는 개꿈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