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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분홍 물결 / 피귀자

 

분홍 물결 / 피귀자

 

 

 

 

세탁소 아저씨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소년같이 맑은 얼굴에 편안한 웃음, 몸에 밴 친절은 한 번의 방문으로 바로 단골이 되게 했다. 육중한 세탁통에서 나온 쪼글쪼글한 옷들은 아저씨 손만 가면 활짝 웃는다. 아저씨는 눈을 뜨면 하는 일도 마지막으로 하는 것 도한 그 일 같다.

천장에 매달린 줄에 연결된 시커먼 다리미는 무쇠 솥뚜껑마냥 큼직하고 우직스럽다. 그러나 다리미 바닥만큼은 겉보기와는 달리 유리알처럼 반짝반짝 빛이 난다. 얼마나 많은 주름들이 저 다리미를 거쳐 간 것일까. 세탁소에 가면 진자처럼 움직이는 다리미 따라 고개가 저절로 왔다 갔다 한다.

아저씨의 다림질대가 놓여 있는 유리창 밖에 ‘꽃모종을 나눠 드려요’라는 쪽지가 나붙었다. 곱게 손질된 세탁물을 내놓으며, 궁금해 하는 내게도 나누어 주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대문 위 시멘트로 만든 작은 공간에서 꽃모종을 뽑아 오는 것이 아닌가. 널찍한 꽃밭에 너무 많이 심어서 나누어 주는 줄 알았으나 그 작은 공간을 이용하여 온 동네를 즐겁게 만들고 계셨다. 벌써 여러 해 동안 계속된 모양이다.

무엇을 소유하였는가 보다 무엇을 나누었는지를 몸소 보여 주고 있는 아저씨. 보리 한 줌 움켜쥔 이는 쌀가마니를 들 수 없고 곳간을 지은 이는 곳간보다 큰 물건을 담을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거창하게 많이 소유하였기에 나눌 것이라는 좁은 생각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독거노인들의 손발이 되어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해주고, 부모같이 공경하며 밤중이라도 아픈 사람을 병원으로 실어 나르는 등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동네 반장일과 봉사활동도 도맡아 하며 모르는 것에 대한 안내도 잘 해주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한겨울, 낯선 동네로 이사 온 우리는 아저씨 덕분에 빠르게 동네의 일원이 되었고 일상이 투명해졌다. 나이가 비슷한 것 외에도 아주머니와는 고향이 같았고 생각들도 어긋나지 않았다. 아저씨의 꽃밭보다 몇 배는 넓은 꽃밭에 받아온 모종을 정성껏 심었다.

따듯한 봄날, 우리 동네는 분홍 꽃물결이 넘실거렸다. 골목과 베란다, 장독대 위에도 아저씨가 나누어 준 꽃들이 가지를 벌어 저마다 자태를 뽑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고 건네는 인사도 다정했다. 골목엔 늘 온기가 감돌았다. 세탁물뿐만 아니라 마음의 주름까지 펴주는 아저씨.

베풀면 세 번 즐겁다고 하지 않던가. 주겠다고 생각하니 즐겁고, 받는 사람의 얼굴을 보니 즐거우며, 받는 이가 나를 긍정적으로 보니 또한 즐겁다고.

디자인이 잘된 명함보다 더 좋은 명함은 처음 만났을 때의 밝은 표정과 눈빛이다. 소금 3퍼센트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있어 사회가 밝게 지탱되리라

컵이 넘칠 수 있는 것도 한 방울의 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