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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 수필]고봉밥 / 주인석

고봉밥 / 주인석

 

 

 

 

동네 어귀에 사는 효근 오빠가 담벼락에 붙어서 우리 집을 기웃거린다. 오빠네 엄마가 우리 집 부엌에 있는 날이면 오빠는 대문으로 고개를 넣었다 뺐다 한다.

엄마는 오빠네 엄마를 향난네라고 불렀다. 향난네하고 부르면 엄마 입에서 정말 향이 나는 것 같았다. 농사일이 바빠지면 엄마는 향난네를 불러다가 논일, 밭일 그리고 부엌일까지 도와 달라고 했다. 그녀가 누구보다 손이 빠르다는 이유 외에 또 다른 까닭이 있었다. 향난네는 청상과부로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았다. 집이래야 움막 같은 곳에서 겨우 비나 피하는 정도였다. 그러니 먹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어른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들이 늘 눈에 밟힌다는 것은 엄마 말씀이다. 그래서 일거리가 생기면 향난네를 일등으로 불렀다.

우리 집에 모내기를 하는 날이었다. 여러 명의 놉 일꾼 중에 향난네도 끼어 있었다. 모를 심고 있는 논까지 중간에 몇 차례 새참을 날라야 하는데 뽀얀 막걸리가 든 주전자를 드는 일은 내가 했다. 엄마 뒤를 쫄래쫄래 따르는 내 모습이 나타나면 아버지는 큰 소리로 일꾼들을 불러 모았다. 들판에 전을 펴서 국수를 먹고 막걸리를 마시면 금방 잔치 분위기가 났다. 그럴 때마다 향난네는 국수를 말면서 집 쪽을 바라봤다. 그 사정을 잘 아는 엄마는 돌아오는 길엔 남은 국수를 꼭 오빠네 집 살강에 얹어 주곤 했다.

점심때가 되어 일꾼들이 집으로 몰려오기 전에 발빠른 향난네는 먼저 돌아와서 부엍일을 도왔다. 엄마는 그런 향난네를 늘 고마워했다. 재바르기로 소문난 그녀 역시 부르는 곳은 많았지만 엄마가 불러주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일꾼들이 돌아오면 향난네와 엄마는 푸짐하게 상을 차려 놓고 밥을 펐다. 밥 푸는 일은 꼭 엄마가 했다. 놋바리에 밥을 꾹꾹 눌러 푸고도 위에 또 수북하게 얹는 것은 엄마만의 씀씀이었다. 일꾼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의 머리통을 싹둑 잘라 이파리 시퍼런 총각김치를 척 걸쳐서 한입에 밀어 넣고 볼이 터지도록 씹었다. 멸치를 넣어 끓인 빡빡한 된장에 푸른 상추쌈의 쌉싸래한 맛이 입맛을 돌게 하면 반찬 그릇은 하나씩 일꾼들의 손에 의해 비워졌다.

남자 일꾼들이 사랑방에서 밥을 먹는 동안 향난네와 엄마 그리고 나는 부엌에서 상을 차리고 둘러앉았다. 엄마는 향난네 밥을 풀 때는 특별히 수북수북 담았다. 정말 내 머리통만 한 고봉밥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향난네는 그릇 위로 올라온 밥만 먹고 밑에 있는 밥은 늘 남겼다. 옛날엔 양반이 고봉밥 윗부분을 먹고 남기면 아랫사람들이 그 밥을 먹고 허기를 면했다고 한다. 그러니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밥인 셈이다. 향난네도 그랬다. 누군가를 위하여 덜 먹고 남겼던 것이다. 엄마가 자꾸 다 먹으라고 하면 배가 불러 이따 먹겠다며 봉지에 싸 가겠다고 했다. 아마도 아들들이 목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향난네 마음을 읽은 엄마는 두 아들 밥을 따로 챙겨 줬지만 그녀는 여전히 고봉밥을 남겨 들고 가길 원했다. 그래서 엄마는 그 이후 향난네 밥은 푸지 않았다. 대신 큰 양푼에 퍼 담고 나물 몇 가지를 챙겨 주면서 집에 가서 먹고 오라고 했다. 향난네는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하고 엄마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효근 오빠는 대문에 서서 그렇게 오빠의 엄마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아무리 집으로 들어오라고 해도 담벼락에서 꼼짝도 않았다. 그러다가 뜨끈한 양푼에 오르는 김 속으로 향난네와 사라졌다.

수십 년이 지난 요즘 밥을 푸면서 그 시절의 엄마와 향난네, 그리고 효근 오빠를 한 번씩 떠올린다. 반질반질한 쌀밥을 풀 때 주걱에 물을 발라 가면서 꼭꼭 눌러 붙이던 엄마의 놀림, 항상 고봉밥 아래를 남겨 가던 향난네, 대문에 붙어 머리를 보일락말락했던 오빠가 뿌옇게 보인다.

오빠는 지금 대기업의 간부가 되어 있다. 고향이라고 한 번씩 들르면 꼭 엄마를 찾아온다. 그리고는 고봉밥 한 그릇 얻어먹고 가자며 넉살까지 떤다. 옛날 그 수줍어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엄마는 오빠가 불시에 찾아와도 따슨 밥을 낸다. 고봉 아들을 하나 덤으로 얻은 기분이라고 하시면서.

향난네는 수년 전에 암으로 죽었다. 오빠는 엄마가 주는 고봉밥을 반 정도 먹으면서 항상 눈시울을 적신다. 그럴 땐 엄마도 함께 눈물을 훔치며 “향난네가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누.“ 하며 등을 쓰다듬는다. 두 사람이 추상에 젖을 때면 나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나는 가끔 옛 생각이 떠올라 밥그릇 수북이 고봉밥을 푼다. 아들 녀석은 요즘 누가 이리 밥을 많이 먹느냐면서 타박하기 일쑤다. 그래도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마른논에 물 들어가는 것처럼 좋은 게 없다더니 딱 맞는 말이다 싶다. 먹다 남기면 내가 먹으면 될 일이다. 밥그릇 하나로 마음을 같이했다는 느낌에 행복할 때가 있다. 그 옛날 향난네도 그렇지 않았을까. 아이들 배를 채우는 것이 더 급했을지 모르나 같은 밥을 나누었다는 것 또한 큰 행복이었으리라.

고봉밥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것은 우리가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 풍요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마음의 빈곤이기도 하다. 옛날 고봉밥에선 넉넉한 아낙의 인심이 보인다면, 요즘 종지 같은 밥공기에서는 바쁜 일상과 깍쟁이의 인정 세태가 보이는 듯하다.

그릇의 밥 긁는 소리마저 삭막하게 들릴 때가 있다. 바닥이 드러난 인심을 긁어모으는 소리 같아 수저 소리에도 애잔함이 느껴진다. 내게 있어 고봉밥은 밥 그 이상의 의미로 남아 있다.

밥을 다보록하게 푸고 그 위에 주걱으로 사랑을 눌러 붙인다. 밥이 남아 걱정이라면 둘이서 하나 고봉밥도 괜찮지 않은가.

 

- 수필집 ‘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