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三代) 이승사자 / 김초성
봉두메 공동묘지를 헤매던 일이 있었다. 뇌염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어린 조카의 무덤이 거기 어딘가에 있다는 말만 듣고 찾아갔던 때다. 찔레가시 덤불이 발에 채이고 마른 엉겅퀴가 옷깃을 끌어당겨서 으스스해진 공포에 눈을 감고 도망쳐 되돌아 나왔던 곳이다.
그곳에 매창의 묘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내가 고교 2학년쯤 아버지를 통해서였다. 비바람에 풍화된 비석을 거두고 부안 부평율회 시우들이 비석을 다시 세웠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안에서 첫 번째 매창 마니아는 증조부이신 김방위 어른으로 생전에 매창을 기리는 일에 앞장섰다고 한다.
아버지가 대를 이었다. 아버지는 매창이 유희경과의 애틋한 사랑, 그리고 허균이 정신적으로 교류한 연인 것으로만 기억 된다는 것에 아쉬움이 많았다. ‘모든 이의 아낌과 사랑을 받았던 예인’으로 부각시키려고 노력하셨다. 그것은 매창에 대한 지극한 흠모도 있었지만, 그녀가 애 고장 부안 사람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가문의 영광을 받은 후손이 조상을 기리듯이 아버지의 매창을 그리는 마음은 사랑하는 누이를 아끼는 마음과 같았다. 당신이 나서서 부안 상소산 기슭 서림공원에 매창의 고혼을 위로하는 시비를 세웠다. 매창이 시름에 겨울 때면 거문고를 뜯던 바위 금대와 혜천(惠川)이 있던 곳이다. 어디선가 거문고 소리와 시조가락이 들려올 듯한 곳, 단아한 시비 뒤 끝자락에 당신의 이름 석 자 김태수(金泰秀)를 새겨두신 뜻을 나는 안다. 부안 사람의 정신적 길잡이가 되려는 아버지의 바람이시다. 시비를 세우고 그 후 군민들과 함께 매창을 기리는 문화제 행사를 자비를 들여 처음으로 개최하였다.
아버지 덕분에 나도 매창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맑고 의연한 심중에 도사린 그녀의 시심은 어디서 솟아난 걸까. 잘 알려진 ‘이화우’는 읊어 볼 때마다 내가 그의 연인인 양 마음 설렌다. 정인을 그리며 절개를 지켜가는 그녀의 연심이 오롯이 드러난 섬세한 가락에 감격하지 않을 시인 묵객이 있었겠나. 정인 유희경과의 사랑과 그리움을 시심으로 화답한 작품들은 뭇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인다.
얼마나 괴로운가 알고 싶거든
금가락지 헐거워진 손가락 보소
그리워도 말 못하는 애타는 심정
하룻밤 괴로움에 머리가 셋소
하룻밤 다시 사랑을 나눈다면 금가락지가 손에 맞을까. 센 머리가 검은 머리로 돌아올까. 예나 지금이나 사랑엔 약이 따로 없나 보다. 그리운 임 보는 일 밖에는. 그 시절의 매창의 이러한 직접적인 표현이 내우 모던하다. 유희경을 사랑바라기 하던 매창의 애타는 상사병이 주옥같은 여러 시를 남겼다.
가무와 탄금 시문 등 기예에 출중했던 매창은 당대의 문장가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읊었던 수백 편의 시가는 서울 양반가는 물론 현리들이 더 즐겼다. 그녀는 신분의 한스러움을 시로 달래고 올곧은 성정을 이연히 지켜가며 자연을 노래했다. 그녀의 운명적인 로망스와 애절한 시에 매료되었던 연구가들은 마침내 그녀를 조선시대 여류시인 반열에 올려 추앙하였다.
내가 시집을 오고 난 얼마 후, 아버지가 정비석을 초대했다. 그는 매창뜸과 시비를 둘러보고 술잔을 진헌하고 헌시하면서 그녀를 현세로 이끌어내는데 일조를 하였다. 소설「명기열전」에서, 매창의 일생과 시에 얽힌 상상력은 가히 시대를 초월한 풍류기를 충분히 발휘하였다. 아버지의 의도는 정비석을 통해 소설 속에서 매창의 삶을 현대에 더욱 꽃피워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매창을 기리는 행사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진 아버지는 결국 매창 사업을 군(郡)에 이양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빠가 대를 이었다.
오빠는 고향문화의 지킴이를 이어받았다. 매창에 대한 집념을 불태웠다. 그녀의 분실된 많은 시들 중 단 한편이라도 더 찾아야 한다는 염원을 잃지 않았다. 동분서주하여 자금을 모으고 매창뜸이 있던 봉두에 공동묘지를 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매창은 사백 사십 여년을 건너뛰어 이제 진정한 예술가로 환생했다. 그녀의 영혼까지 사랑하게 된 애향민과 관광객들이 오빠를 치하할 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해 했다.
증조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오빠, 우리 집 삼대가 왜 남달리 매창과 인연을 맺었을까. 세 남정네의 매창에 대한 흠모는 참으로 의아하다. 제각기 그리운 임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씨를 흠모하였는지 예술을 애모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세상에 다 펴지 못했던 시와 삶의 이야기를 다시 살려내는 우리 집안의 삼대를 이은 세 남정네들이 열정을 바쳤다는 것이다 그들은 매창을 다시 불러온 이승사자이었음에 틀림없다. 매창의 향기는 그윽이 차오르는데 정작 매창을 이승으로 불러 온 그분들은 모두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누군가 그분들의 매창 사랑과 고향사랑을 기리는 이가 있다면 혹시 그분들도 이승으로 오실 수 있으려나.
나에겐 언제부터인가 어떤 사명감이 안개처럼 드리우곤 한다. 나도 그에 대하여 글로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늘 따라 다닌다. 그런데도 매창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거나 연구하지도 않은 형편이다. 어쩌면 고민만 하다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끝날지도 모른다. 예비지식도 없이 숙제를 받은 것 같아 마음 편하지 않다. 꿈속에서라도 어떤 현몽을 받았으면…….
차라리 옛 모습 그대로 봉두에 공동묘지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하는 푸념을 해본다. 그녀의 혼백을 불러오는 글 푸닥거리라도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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