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言語) / 김규련
말은 도구다.
사람의 가장 원초적인 생활도구는 말이다. 사람은 말로써 의사 소통을 한다. 사물과 상황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말로써 표현하기도 한다. 사람은 서로 말을 주고받음으로써 비로소 문명을 일으켜 오늘에 이르렀다. 문자도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말은 문자보다 먼저이고 쉽고 편리하고 강하고 빠르다. 다만 문자보다 시공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
말은 힘이다.
적절할 때 적절한 말 한 마디가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 암흑 속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 광명을 준다. 망설이는 사람에게 용기를 준다. 비탄에 젖어 울고 있는 사람에게 환희를 준다.
불교에는 육바라밀이라는 수행 덕목이 있다. 그 첫째가 보시다. 재물을 나눠주는 것은 재보시요, 가르침을 나눠주는 것은 법보시다. 그런데 재물도 아니고 가르침도 아닌 말로써 다른 사람에게 용기나 희망이나 아니면 위로나 지혜나 기쁨을 줄 때 그것을 언사시라고 하지 않는가. 천냥 빚도 말만 잘 하면 갚을 수 있다는 속담은 말의 위력을 잘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말에는 부정적인 힘도 있다.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가 타인의 가슴에 큰 상처를 줄 수가 있다. 말 한 마디 실수가 평생의 우정을 깨뜨릴 수도 있고, 실없는 농담 한 마디가 행복한 가정을 파괴할 수도 있다. 간단한 말 한 마디로 남의 급소나 약점을 찔러 죽게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촌철살인(寸鐵殺人)이란 말이 생겨나지 않았는가.
말은 인격이다.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 똑같은 두두, 물물, 사사, 건건, 초초, 화화를 보고도 느끼고 생각한 바를 표현하는 말에서 고매한 인격과 평범한 생활인 그리고 천박한 잡배의 모습이 나타난다.
말은 세상의 거울이다.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무심코 주고받는 말에 그 시대의 인심이 비쳐 보인다. 세상이 험악하면 말도 따라 험악해지고, 세상이 태평성대가 되면 말도 부드럽고 순하고 바르게 된다.
우리 시대의 말은 어떤 모습일까. 극단의 이기주의와 흑백논리에 멍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삐뚤고 꼬인 사례를 들어본다.
내가 인사하면 예의라 하고 남이 하면 아부라 한다. 내가 어울리면 화합이고 남이 하면 패거리라 한다. 내가 화투치면 오락이고 남이 하면 도박이다. 내가 받으면 떡값이고 남이 받으면 뇌물이다. 내가 바람 피우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사자후고 남이 하면 개 짖는 소리다. 내가 터뜨리면 진실이고 남이 하면 음해이다. 내가 하면 협조고 남이 하면 편들기다. 내가 하면 해명이고 남이 하면 물타기다. 내가 하면 용기고 남이 하면 막가파다. 내가 하면 긴급조치고 남이 하면 깜짝쇼다. 내가 하면 검증이고 남이 하면 흠집내기다. 내가 머뭇거리면 여유이고 남이 하면 우유부단이다. 내가 하면 기백이고 남이 하면 와일드다. 내가 하면 현명하고 남이 하면 교활이다. 내가 하면 구국의 결단이고 남이 하면 밀실의 야합이다. 내가 하면 우국충정이고 남이 하면 탐욕이다…….
이런 고약한 말버릇이 어디에서 왔을까. 이쯤 되면 정(正)과 사(邪), 선(善)과 악(惡), 진(眞)과 위(僞)가 따로 없다. 다른 사람은 언제나 그릇되고 나는 언제나 바르고 옳고 참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부터 삼사일언(三思一言)의 지혜로 말을 아끼고 바르게 쓰는 버릇을 길러야겠다. 생활인의 지혜로서 으뜸이 되는 것은 사성언(四聖言)이라 하지 않았던가.
보지 않았으면 보지 않았다고 말하라. 듣지 않았으면 듣지 않았다고 말하라.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말하라. 깨닫지 못했으면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라.
우리가 공부해야 할 것은 어찌 사성언뿐이겠는가. 참말하는 진어(眞語), 바르게 말하는 정어(正語), 실다운 말을 하는 실어(實語), 속이지 않는 불광어(不言狂語) 거짓말 안하는 불망어(不妄語) 등을 일상화해서 우리의 언어부터 순화시켜야 되지 않을까.
때로는 이심전심으로 전달되는 무언의 언어가 더 정곡을 찌른다. 석가가 영상회상에서 법좌에 올라 법문을 하기 앞서 연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들어 보이자, 아무도 그 뜻을 몰랐다. 오직 가섭(迦葉)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했다. 그로써 석가는 가섭에게 교외별전으로 불교의 진수를 전해 줬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염화미소(拈花微笑)가 아니던가.
묻는 말에 아무 응답도 하지 아니 하면서 무언의 응답으로 진리를 설파할 수도 있다.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는 도부(道副), 총지(摠持), 도육(道育), 혜가(慧可)라는 뛰어난 네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어느 날 달마는 머지 않아 열반할 것을 깨닫고 교권을 미리 물려주려고 네 제자에게 그 동안 깨친 바가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다.
저마다 도가 어떻고 마음이 어떻고 공이 어떻고 장황하게 말을 했다. 그러나 혜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승 앞에 나아가 큰 절을 올리고 제자리로 돌아와 묵묵히 앉았다. 그런 그에게 달마는 가사를 전수하고 그를 선종의 제2조(第二祖)로 삼았다. 이를 두고 지언무언(至言無言)이라 할까, 아니면 무언이무한언(無言而無限言)이라 할까.
말은 사람만의 전유물일까. 어쩌면 모든 짐승, 모든 미물까지도 저들 나름대로 말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불가에는 찰설(刹說), 중생설(衆生說), 삼세일체설(三世一切設)이란 말이 있다. 산하대지, 일월성신이 말하고 중생이 말하고, 과거, 현재, 미래 일체 존재가 다 말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말을 바르게 하는 생활질서도 세워야 하지만 바르게 듣는 지혜가 더 있어야 하겠다. 심이(心耳)가 있어 자연의 목소리에 숨어 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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