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베베, 지지베베 / 김잠복
주말 오후였다. 시계를 보니 인기 드라마 방송 시간이다. 소파 위에 비스듬히 누운 남편은 텔레비전을 틀어놓은 채 가늘게 코를 골고 있다. 손에 꼭 쥐고 있는 리모컨을 살며시 뺏어본다. 벌떡 일어나며 뉴스를 보던 중이었다고 올빼미 같은 눈을 한다. 오늘도 내가 양보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이웃들은 손에 손을 잡고 꽃놀이가 한창이지만 둘만 사는 우리 집은 절간이나 진배없다. 나는 조금 전까지 책에다 눈을 팔고 있었고 남편은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취침 중이었다.
남편은 말이 드문 사람이다. 한번 다문 입은 심 봉사 눈 뜨는 것만 큼이나 어렵다. 아침에 현관문 앞에서 ‘다녀 오이소 좋은 하루 됩시더’라든지, 저녁때 ‘또 만나서 반갑네요.’라는 말을 나는 습관처럼 하고 있지만, 그로부터 ‘흠’ 하는 반응이라도 듣는 날은 횡재한 날이다.
나는 대체로 말이 많은 편이다. 남편 앞에서 아양도 곧잘 떤다. 비밀로 하고 싶은 말이나 진득하게 벼루여야 할 말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나와 버린다.
나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남자보다 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텔레비전드라마에서도 여배우들의 대사는 따발총 수준이다. 그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집안의 자잘한 일들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대신 남자들은 바깥일이나 중요한 것에만 관심을 두는 수가 많아 말수가 들어든 것은 아닐까.
하지만, 동물의 세계에서는 다르다 한다. 사자나 호랑이는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힘자랑하고, 공작은 암컷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컷이 화려한 날개를 펼치기도 한다. 하물며 매미나 귀뚜라미도 암컷을 불러 모으기 위해 더 요란하게 울어댄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유독 인간만 암컷이 더 설친다는 생각이다.
우리 집 베란다에는 잉꼬 한 쌍이 수해 전부터 같이 살고 있다. 노란색이 암컷이고 연두색이 수컷이다. 잉꼬는 언제 보아도 부리를 맞대어 비벼대며 지져댈 때가 있어 그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고 기특한 마음이다. 그들의 사랑 놀음을 지켜볼라치면 암컷은 제자리에서 그냥 한 번씩 ‘째째’ 거릴 뿐인데 수컷은 암컷의 좌우를 번갈아 옮겨가며 ‘짹짹짹짹’ 갖은 아양을 떨어댄다. 이때엔 속으로 남편도 잉꼬의 천성을 조금이라도 닮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 남편에게 ‘잉꼬가 우리보고 자기들처럼 재미나게 지내라 하네요.’라고 말을 걸어보지만 부질없는 독백이 되고 만다.
어릴 적 고향 집 처마 밑에는 제비집이 두어 군데 있었다. 봄이면 제비들이 돌아와 묵은 집을 손질하느라 분주했다. 널브러진 지푸라기를 새것으로 바꾸고 진흙을 물어와 둥지를 손질하는 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바쁘기만 한 제비지만 한 번씩 빨랫줄에 앉아 쉬어가기도 했다. 잠시 동안만 이라도 제비는 연방 ‘지지베베, 지지베베’ 알 수 없이 지져대다가 의논을 맞춰가며 다시 날아가고는 했다. 나는 그럴 적마다 그들의 암수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 궁금증은 얼마 못 가서 풀렸다. 유난히 지져대던 쪽이 수컷이었다. 수컷은 암컷이 둥지에서 알을 품는 동안은 더 큰 소리로 먹이를 물어다 암컷에게 건넸다. 대신 암컷은 조용히 수컷이 주는 먹이를 받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인간과 달리 암컷보다 수컷이 더 삭삭 해도 서로 맞추어가며 지내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며칠 전에는 서울 아들 집에 다녀왔다. 아들은 혼자서 직장생활 하며 지내느라 집안은 언제 들러도 어수선하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상경하여 밑반찬이나 집 안 청소를 해줘 가며 며칠씩 머물다 내려오고는 한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그곳에 가 있을 때가 잦다. 하루가 멀다고 수화기를 들어 ‘별일은 없나, 냉장고 음식은 진작 먹어라, 밑반찬도 챙겨 먹어라, 세탁기는 언제 돌렸나, 청소도 좀 하고 지내라.’지지베베, 지지베베……. 대신, 남편은 나와 달리 며칠에 한 번씩 걸려온 전화기를 받아들고는‘할말 있나, 알았다.’라는 말이 전부다.
젊었을 적에도 남편은 입이 무거웠다. 그것마저 매력으로 보일 때였다. 가끔 던지는 말로도 서로의 마음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늙어갈수록 말수는 더 줄어들었다. 기력이 떨어져서일까. 무슨 재미로 사는가 싶을 정도다. 그런 남편이 측은하기까지 하다. ‘죽어도 해병, 살아도 해병’을 고하던 그 패기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붉은 팔각 모자를 훈장처럼 거실 벽 가운데다 걸어두고 지나칠 때마다 거수경례를 붙이며 큰 소리 치던 그 젊음은 어디다 숨겨놓았을까. 지금 내 옆에는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이마에 골진 주름을 훈장처럼 붙인 할아버지가 소파에 누워, 눈을 텔레비전에만 고정하고 있다.
내가 보고 싶었던 드라마도 벌써 끝났을 시간이다. 남편을 일으켜 마을 앞 공원에라도 같이 가자고 조를 참이다. 꼭 쥔 그의 손에서 리모컨을 건네받아 전원을 끄는 데 성공했다.
‘일어나 공원에라도 나갑시다.’ 지지베베, 지지베베……. 베란다에서는 ‘짹짹짹짹, 째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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