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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도시의 유목민 / 남영숙

도시의 유목민 / 남영숙

 

 

 

 

우아한 청춘 남녀가 부부로 탄생되고 부케가 던져졌다. 하객이 웃음과 담소를 양념처럼 버무리며 음식을 먹는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고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직도 그들의 체온이 남아있는 빈 의자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쓸쓸한 풍경이다. 문득, 외로움을 느낀다.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물과 목초를 찾아 이동하던 유목민처럼 홀로, 혹은 무리를 지어 다음의 목적지를 향하여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별다른 용무가 없어 하릴 없이 돌아 온 나를 맞은 것은 아이들이 장성해서 떠나버린 빈 집의 적적함이다. 식탁 위의 신문을 집어 든다. 이름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의 글이 눈에 띈다. 청취자들이 응답한 외로움에 대처하는 방법과 함께 자신의 소회를 적은 글이었다. 사람들의 외로움은 뜻밖에도 깊었다. 밥을 먹으며 밥알을 세기도 하고, 보리과자 두 봉지를 쏟아 놓고 어느 것이 더 많은 개수를 가지고 있는가를 가려내기도 하고… 압권은 자신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또 답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가 모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후배들의 가슴앓이 또한 깊은 것이었고 자신도 때때로 그 쓸쓸한 느낌에 침몰해 버린다고 한다.

지난 기억들은, ‘지독히 고독할 때면 산을 오른다. 요즘은 청진기를 품속에 지니고 간다. 나무의 가슴팍에다 그것을 대고 너는 얼마나 쓸쓸하니, 그리고 너는, 또 너는, 하고 묻는다.’는 어느 중진 문인의 표현에 찬탄과 공감을 금치 못했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듯 홑이불로 슬쩍 가려져 있어 바람 한 번 일렁이면 와락 뛰쳐나올 외로움들이 도처에 가득하다.

인간은 왜 그렇게 외로운 것일까.

사람들을 연결하는 통신수단의 발전은 가히 혁명적이다. 우리를 이어주는 물리적 장치는 그렇듯 눈부신데 진정한 소통이란 것이 이루어지고 있기나 한 것인가. 역설적이게도 통신매체의 범람이 도리어 그것을 어렵게 한다. 독서실의 칸막이처럼 자폐의 공간에서도 바깥과의 접속이 무한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다수와의 접속으로 관계의 폭은 넓다. 그러나 그저 표피적인, 일방적이고 선택적인 접속일 뿐 관계의 깊이는 없는 것이다. 소통은 사로간의 이해를 전제로 한다. 이해란 깊은 교감 위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표피적은 접속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말은 난무하되 속내 깊은 대화는 없다. 비밀번호로 무장을 하고, 자심만의 공간에 안주하면서 물 위의 기름처럼 서로 겉돌 뿐이다. 그것이 외로움을 부추긴다.

그것은 온라인에서만의 분제가 아니라 그 공간의 밖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광범위한 교제만 빈번하게 일어난다. 외교적 수사들만 가득 하거나 더 크지도, 작지도 않을 도토리 키들을 서로 견주어 보려 하는,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만남 후의 귀가 길은 늘 공허하다. 객창에 걸린 달빛보다 도시의 소음과 군중 속에서 더욱 진한 오로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럴 땐 발길이 터벅터벅 소리를 낸다. 숲을 이루지 못하고 도심에서, 거리에서, 공해와 소음에 시달리는 나무가 자신의 모습인가 한다. 그것은 이 시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인의 말은 외로움은 인간이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일생을 통하여 그것을 주제할 의무 또는 권리를 갖는다. 육신을 싸고 있는 피부처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그렇다면 그 쓸쓸한 감정에 농락당할 일이 아닌 것이다. 사실, 외로움이란 고급 감정이다. 희, 노, 애, 락에 대한 상위의 개념이다. 어떤 이는 길을 떠나 눈물이 펑펑 쏟아질 만큼 고독감을 느낄 때 여행의 묘미를 느낀다고 한다. 그러기 위하여 일부러 집을 떠나 자신의 내면과 가장 고요하게 만나는 시간을 즐긴다고 한다. 배추가 소금에 절여져 맛있는 김치가 되듯 그냥 쓸쓸함에 절여져 보는 것이다. 발효된 외로움은 인간을 성큼 키우는 밑절미가 되기도 한다. 홀로인 느낌은 내면 성숙의 발원지인 셈이다.

그러나 그렇게 무리로부터의 단절을 즐기는 것도 녹록치 않은 역량이다. 그렇듯 외로움을 즐기지 못할 양이면 무리로 다가서는 길밖에는 없다. 등 돌린 만큼 외로운 것이니, 타인이 손 내밀기 전에 자신이 먼저 손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에게 걸어갈 수밖에는.

행복도 기술이라고 한다. 행복을 만들거나 느끼는 것은 개인의 재량에 달린 것이라는 말이겠다. 외로움을 주재할 별 역량이 없는 나는 물과 풀을 찾아 떠나는 유목민처럼 사람을 찾아, 소통을 찾아 길을 나서야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