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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자는 척 하면 / 김상립

자는 척 하면 / 김상립  

 

 

 

 

그냥 잠들어 있는 사람은 인기척을 내거나 가볍게 흔들어도 놀라 깨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일부러 자는 척 하는 사람은 웬만큼 큰 소리로 불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몇 번 흔들면 ‘끙’ 하고 돌아 누어 코까지 고는 시늉을 하지요. 이쯤 되면 깨우려던 사람이 도리어 민망해져서 그만 두게 됩니다. 지금의 세상에서는 꼭 밝혀져야 할 어떤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또 위에서 시키는 일이 양심에 어긋나는 짓이라는 것을 뻔히 간파했으면서도 제게 손해가 돌아 올까 봐 자는 척 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떤 조직 내에서 이루어지는 음모를 밝히려 해도 ‘의리’란 얼토당토않은 무기를 내세워 은근히 압력을 가하기도 하지요. 집단이기주의가 정상적인 사람들을 억지로 잠자게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생길 것 같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면서, 불리하거나 아무 소득이 없을 것이라 여겨지면 깨어있다가도 자는 척, 연기를 잘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득세를 하는 현실을 봅니다. 우리 사회가 오직 성장만을 목표로 숨가쁘게 달려온 결과 지나치게 성공제일주의에 젖어있는 분위기를 곳곳에서 감지하게 됩니다. 그런 까닭인지, 우리는 말끝마다 성공과 출세를 들먹입니다. 마치 성공한 사람만이 인간 대접을 받을 것 같은 흐름이 젊은 이들을 더욱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지요. ‘성공적인 유형’만을 삶의 목표로 삼도록 독려하는 일은, 이기적인 경쟁관계가 판을 치게 하는 사회를 만들어 갈 게 분명합니다. 당연히 앞장 서서 이런 일을 멈추도록 노력해야 할 사람들도 뒷짐만 지고 서 있습니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어떤 구설수에 말려들지 모르니 차라리 모른 척 졸고 있는 게, 제 보신에는 상책이라는 판단을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어느 누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겠습니까?    

원래 경쟁관계에서는 지는 사람이 있어야 이기는 사람도 있는 것이지요. 운동경기를 보아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당하게 패한 사람이 억지로 우승한 사람보다는 더 귀한 법이지요. 부정한 방법으로 경쟁에서 이기는 것 보다는 정직하게 지는 사람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갈 게 분명하건만, 세상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학교나 사회에서도 경쟁에서 깨끗하게 지는 방법을 일러주지 않습니다. 정작 경쟁에서 졌을 때도 그것을 의연하게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지금의 제 처지나 실력은 뒷전으로 미루어 두고, 무조건 이길 방법을 배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더 높고, 더 크고, 더 많고, 더 힘센 것만 올려다 보며, 개인적인 성공만을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들을 양산해 내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하나같이 갖고 싶어 하는 돈과 명예나 권력 중에 어느 한 가지 변변하게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가진 자보다 더 가치 있게 또 행복하게 한 생애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직, 간접으로 만나게 됩니다. 가난하지만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 베풀고 사는 사람들이나, 자기의 고통도 만만치 않은 데 남의 것을 제 일처럼 도맡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감동을 줍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 장기(臟器)나 목숨까지도 생면부지의 사람을 위해 내놓기도 합니다.   

이치로 따지자면 많이 가진 사람이 그의 몫에서 조금 떼내어 이웃에 나누어 주기가 쉬울 것 같은 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물론 부자가 수 많은 사람들을 도운 사례가 왜 없겠습니까 만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지면 가질수록 그 가짐 자체에 얽매여 도리어 남에게 베풀 마음이 사라지기 십상이라니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흔히 말하는 출세나 성공이라는 것들이 사람 사는 데 있어서 최상의 덕목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나 겸손과 같은 감정들이 삶을 더 가치 있고 보람되게 끌어 줄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게 합니다. 나는 이제라도 ‘자는 척’ 하지 말고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특히 내 영혼 앞에서는 게으름피지 말고 얼른 일어나 옷 깃을 여미고 바로 앉아야 하겠습니다. 자는 척, 열심인 척, 착한 척, 명 연기를 하며 살아왔던 지난 날을, 내게 남아 있는 석양에라도 열심히 말려야겠습니다. 특히 ‘내 직업과 양심 앞에서 늘 깨어 있으려고 애써왔고, 자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는 나의 오만한 마음에서 깨어나야 하겠습니다. 내가 수필을 쓰는 일도 ‘깨어 있도록 하는 노력의 한 방편’이라고 남들에게 토로했던 일까지도 황급히 거두어 들여야겠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도 계속되는 바람은 있습니다. 내 비록 한낱 스쳐가는 바람 끝 같은 찰나를 붙들고 살고 있지만, 내 삶의 흔적일랑 찰나를 따라 허망하게 사라지지 말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닌 체, 영원한 시간 속의 한 부분으로 이어질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찾게 해 달라는 바람입니다. 나의 이런 반성과 소망은, 내가 노을을 자주 바라보는 나이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 지금 내게 남아있는 가장 소중한 기도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