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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멀리서 보기 / 남영숙

멀리서 보기 / 남영숙      

 

 

 

 

그와의 통화 후, 떠나지 않고 맴돌이 하며 긴 여운을 남기는 말이 있었다. “멀리서 보면 그렇지요”였다. 짤막한 그 한 마디는 그가 건넨 몇 마디 말들에게 마음껏 상상의 덧칠을 하게 하였다.

그의 사랑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이미 노인이 되어 버린 남편을 지극하게 보살피는 것이 그러하고, 많은 연령 차이가 궁금했다. 그것으로 유추하면 그 사랑은 바람처럼 와서 부딪고만 갔어야 할 것이었고, 상대에게 섣부른 희망을 갖지 말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배들이 서로 엮이어 정박하며 물결에 떠밀리지 않듯, 서로를 단단히 묶어 통념의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부부가 되었다. 그의 사랑의 특별함이 궁금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어서 ‘본디 바라는 바’이지만 청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대신 찬사를 하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 했다. 통화 중에 그가 몇 마디로 내 가슴의 현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것은 둔탁하지만 강한 소리를 냈다.

저녁 모임을 위한 외출은 그에겐 작은 전투다. 남편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아기를 재우듯 그를 “재워 놓고” 나들이를 한다는 것이다. 그 시간에 맞게 재우려면 종일을 “놀아주어야”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크고 작은 외출 후엔 ‘칭얼대는’ 남편을 위한 유, 무형의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나직하고 감칠맛 나는 화법에 실린 생의 내공에, 감전된 듯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뒤이어 삶이, 사랑이, 서러운 아름다움이라 생각했다.

시간은 인간의 기억을 지우는 노련한 청소부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역할을 바꾸는 것 또한 시간이다. 지아비의 청순한 어린 연인이었을 여인이 이제 강한 모성으로 그를 보듬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사랑으로 낡아져 왔다. 살아간다는 것이, 명치끝이 아릿한 아픔이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통증의 승화가 있어 생은 아름다워진다. 그런 삶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서 칭송을 아끼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가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단호하여 ‘멀리서 보아’ 그럴 뿐이며 칭찬을 사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칭찬에 부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 속내야 어떠하든 ‘멀리서’ 본 그대로 그의 사랑을 여전히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기로 하였다.

세상의 어느 사랑에도 ‘콩 꺼풀’의 유효 기간은 존재한다. 그녀라고 하여 그것이 없었으랴.  잉걸불로 타오르던 사랑의 짧은 낭만 후에 뒤따라 온 긴 책무가 얼마나 큰 아픔으로 다가 왔을 것인가는 물어 보아야만 알 것인가. 자신의 사랑에 대한 한 줄기 회한이 없었을까. 아름답게 보이는 까닭이 가까이서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굳이 속내를 헤집어 실체를 보아 버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의 사랑의 실체만 그러할까.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지 않겠는가.

모자이크그림은 조금 물러나서 보아야 확연히 보인다. 유화 그림, 또한 그렇게 보아야 명암이나 색조의 선명함이 두드러진다. 대저, 한 발짝 물러서서 보아야 근사해지는 것이 수런거리는 세상이 아닌가 한다. 사람의 풍경에서 그 점은 두드러진다. 지척에서 보는 삶이란 통증만 자욱할 뿐, 보여 지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누구인들 그 점에서 자유로울까. 오랜 옛적, 제왕이라고 하여 복되기만 하였을까. 화려한 용포에 휩싸인 외로운 한 인간이었을 뿐. 스타덤에 오른 배우도, 크게 성공한 사람도, 모두 물위에 뜬 우아한 백조의 모습을 위하여 물밑의 갈퀴는 수도 없이 움직여야 하는, 그 부산한 삶의 얼굴이란 여느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세상 풍경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세상은 연민이 가득한 공간이 되어 버린다. 

어느 지인은 자신의 시력이 나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긴다고 하였다. 집안의 웬만한 먼지나 어지러움은 보이지 않아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말을 대상과의 물리적 거리가 아닌 마음의 거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말의 은유였다. 인간의 시력이 나이듦과 함께 근시에서 원시로 옮아가, 멀리의 것이 잘 보이는 까닭이 거기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기는 긍정적인 시선의 ‘반숙’상태가 아니겠는가. ‘완숙’의 상태는 관조이리라. 그것은 켜켜이 쌓인 삶의 지층이 가져오는 선물인 셈이다.

사세가 복잡하여 각단을 잡을 수 없을 때 그 소용돌이에서 한 걸음 물러나면 자신에게 마저 객관적인 시선이 생기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된다.

이제, 세상을 그렇게 멀리서 보고자 한다. 멀리서 보아 아름답다면 그 속내야 어떠하든 아름다운 것이다. 세밀한 흠결까지 볼 것은 없다. 보퉁이 속의 삶을 구태여 끌러서 볼 것은 없는 것이다. 너의 것이나, 나의 것이나, 삶이 복잡하고 아프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보자기의 색깔이 아름다우면 그 내용물도 고우리라 치부해 버릴 것이다. 멀리서 보는 삶들은 끝내 고요하고 평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