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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그들의 몸짓이 수상하다 / 구 활

그들의 몸짓이 수상하다 / 구 활

 

 

 

 

화담 서경덕(1489~1546)은 이 자리에 모시지 않으려 했다. 송도삼절(화담 황진이 박연폭포)로 꼽히는 황진이가 갖고 있는 귀한 무엇을 공짜로 주겠다며 제 발로 찾아왔는데도 끝내 받지 않았다니. 화담에게는 아예 풍류라는 게 없는 줄 알았다.

대신에 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다 결국 애욕의 늪에 풍덩! 빠지고 만 지족선사를 대타로 기용했다. 그리고 진이의 무덤을 찾아와 술 한 잔 올리며 시를 읊고 간 백호를 핀치 히터로 등장시켜 <풍류 기행>의 황진이편을 마무리 지우려 했다.

그런데 늦은 밤 잠에서 깨어나 화담의 마음이 되어 진이를 생각해 보니 나이와 체면 때문에 가까이 다가서지 못한 애증의 그림자가 그렇게 짙고 절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글을 쓰지 않고는 불면의 밤을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아 저승이라는 먼 나라에 계시는 화담과 진이를 오시게 하여 푸닥거리 한 판을 벌이기로 했다.

나는 근엄한 사람을 싫어하는 편이다. 시골 교회의 장로님 같이 고지식하거나 교감으로 승진하지 못한 고루한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 같은 사람, 허우대는 멀쩡한데 별 것 아닌 것을 끝까지 우기는 우리 동네 복덕방 영감. 화담도 그런 부류의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노 브래지어 차림으로 찾아온 진이를 포옹 한 번이면 하늘이 몽롱해지면서 아기도 생길 수 있는 에로스의 동산으로 인도하지 못했겠지.

화담과 진이의 사랑에 플라토닉 러브라는 화관을 씌워선 안 된다. 그들은 몸과 몸이 부딪치는 치열한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이다. 에로스(eros)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랑을 그들의 명성에 눌려 플라토닉으로 치장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플라토닉 러브란 사랑의 헛기침이며 우둔한 환상이며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지어낸 수사(修辭)다. 진짜 사랑은 쟁취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붉은 색 하늘 과일이며 그 이름은 에로스다.

화엄경 행원품을 보면 “보시는 소유욕을 버리는 실천행으로 반드시 재물공양에는 법공양이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보시를 할 땐 마음만 주지 말고 물질까지 얹어주라”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사랑을 할 때는 생각만으로 간음하지 말고 몸까지 던져라”는 바로 그 말씀이다. 정조는 입술과 젖가슴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오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화담의 시조)

진이의 생몰 연대가 확실치 않아 헤아리기 어려워도 화담과의 나이 차이는 넉넉잡아 십오륙 년. 미모와 재능 그리고 학식까지 두루 갖춘 진이가 화담의 인품을 숭앙한 나머지 열 번 찍을 각오로 찾아온다. 이 시는 화담이 정인이 아닌 문하로 진이를 받아들인 다음 자꾸만 산란해져가는 마음을 시조로 읊은 것이다.

화담의 마음자리를 짚어 보기란 이 시조 한 수로 충분하다. “설월이 만창(滿窓)한데 바람아 부지 마라/ 예리성(신발 끄는 소리) 아닌 줄은 판연히 알건 마는/ 그립고 아쉬온 적이면 행여 긘가 하노라”는 무명 시인의 절규와 사뭇 닮아있다. 화담의 ‘꿀 먹고 싶은 벙어리‘의 내색 못하는 타는 목마름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진이의 화답이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진이는 하마나 하고 기다렸지만 화담의 꼴난 체면은 ‘그 집 앞’을 오가며 서성이게 허락하지 않는다. 오메, 정말 환장하것네.

“마음아 너는 어이 매양에 젊었는다/ 내 늙을 적이면 넨들 아니 늙을소냐/ 아마도 너 좇아 다니다가 남 우일가 하노라”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을 두려워하는 화담의 안타까움이 시조라는 붉은 각혈덩이로 쏟아 놓는다. 세상에 이만치 슬픈 광경이 또 있을까.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는 ‘세상에 가장 슬픈 풍경은 도쿄타워에 비가 내리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건 화담의 통곡 앞에는 한 방울 눈물보다 못한 것이다.

에로스는 생의 본능이지만 타나토스(thanatos)는 죽음의 본능이다. 인간은 사랑을 찾아 생의 의욕을 다지는 에로스적인 면과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타나토스적인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모순은 서로 충돌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화담의 마음속에는 두 에너지가 공존하면서 많은 갈등을 겪었겠지만 죽어서도 진이에 대한 사랑은 아마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의 몸짓이 아직도 수상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