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그리고 윤정희 / 허창옥
햇살이 부서지는 강변에서 소년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평화였다. 하지만 카메라는 이내 검은 강물을 비추었다. 한낮의 강물이 시커멓게 주름진 물무늬로 클로즈업되었을 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문득 눈을 든 소년의 눈에 떠내려 오는 여자의 시체가 보인다. 그게 무엇인지 소년은 미처 인지하지 못한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찰나, 화면 속 소년과 관객은 동시에 사태를 파악한다. 평화가 와장창 깨진다.
영화 <시>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러한 상황과 전혀 따로 놓여진 듯, 미자가 문화센터 시창작교실을 기웃거리는 것으로 영화는 다른 각도에서 다시 열린다. 미자는 예순여섯 살이고 고등학생인 손자와 살고 있으며 알츠하이머 초기증상을 갖고 있다. 낡고 비좁은 집에서 누추하게 살면서도 예쁜 모자와 세련된 옷차림으로 모양도 내는 찌들지 않은 순진함을 드러낸다. 시창작교실에 마감이 지나서 등록하고 강의사간에도 지각을 하며, 뜬금없는 질문을 해서 맥락을 끊는가 하면 혼자 중얼 거리기도 한다. 목소리도 들뜬 듯 톤이 높고, 속없이 웃기도 잘한다. 전혀 심각하지가 않다.
이런 미자와 영화가 시작되면서 보여준 그 끔직한 장면을 대체 어떻게 연결 지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러나 어느 날 불쑥 미자 앞에 나타난다. 미자의 손자와 그의 친구들이 여학생에게 집단 성폭행을 범했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간 가해자부모들의 모임에서 미자는 그 경악할 내용을 도무지 알아듣는 것 같지가 않다. 아버지들이 앉은 방에서 빠져나와 화단의 맨드라미를 고뇌 없는 얼굴로 들여다보다가 맨드라미꽃이 피같이 붉다고, 꽃말이 방패라고 말했다. 피와 방패, 폭력과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인간본능의 은유려니.
감당할 수 없는 사태 앞에서 아무 것도 입력되지 않은 것 같은 미자의 표정이 압권이다. 그런 채로 시를 쓰겠다고 여기저기를 다니며 생각나는 대로 긁적이는 미자를 윤정희는 그 어떤 절규나 울음보다 더 절절하게 연기한다. 수필적으로 표현하면 윤정희는 내포화자인 미자를 온몸으로 말한다. 완전한 육화肉化다.
피해자의 어머니를 만나러가서 살구가 이렇고 저렇다 한다. 그렇듯 일상적인 말 몇 마디와 실없는 웃음만 보여주고 정작 해야 할 말은 잊은 것 같던 미자가 소나기를 두들겨 맞으며 하염없이 앉아 있다. 시창작교실에서 만난, 음담패설을 해대서 ‘저질’이라고 경멸했던 형사 앞에서 미자는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운다. 자기에게 할당된 여학생의 목숨 값(?) 오백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병든 노인과 욕조에서 섹스를 하는 미자의 얼굴이 덤덤해서 관객은 처참하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전혀 무심한 손자와 아들의 죄를 단지 돈으로 갚고 덮어버리려는 뻔뻔한 아버지들 사이에서 별다른 저항이 없어보이던 미자는 시 <아네스의 노래>를 완성한다. 미자는 죽은 여학생이 걸었을 길을 걷고, 몸을 던졌던 다리 위에 서서 강물을 내려다본다. 그러다가 모자를 떨어뜨린다. 모자는 미자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렇다. 여학생과 미자가 걸었던 길을 카메라만 간다. 카메라가 검푸른 강물을 비출 때 거기에 미자가 없다. 가슴을 쓸어내는 순간이다.
문학을 생각한다. 수필을 궁구한다. 이창동 감독은 소설가다. 장면과 대사에 군더더기가 거의 없다. 메시지는 행간에 숨겼다. 하여 고도의 함축미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카메라가 비춘 검은 강물, 또 영화의 앞뒤부분에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배치한 배드민턴 치는 장면은 내용과 형식 두 가지 측면에서 수미상관이다. 맨드라미꽃․ 배드민턴․ 모자 등의 소재들,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시詩같은 제재들이 모두 상징성을 띠고 있다. 밀도 높고 탄탄하다.
감독과 배우는 절제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고뇌는 깊고 처절하였으나 쉬이 내비치지 않는다. 여학생의 아픔과 죽음, 그 비통함을 다 뱉어버리고는 결코 <아네스의 노래>란 시가 나올 수 없는 게다.
폭력에 무감각한 인간을 준엄하게 꾸짖는 영화 <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숭고를 전율이 일도록 보여준 영화 <시>, 거기에 배우 윤정희가 있다. 수백 번 내 글의 화자가 되었던 나는 무얼 말했던가, 얼마나 헐거웠던가. <시> 그리고 운정희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모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난 수 있기를
-<아네스Agnes의 노래> 1, 4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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