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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길을 가는 마음 / 김기림

길을 가는 마음 / 김기림

 

 

 

 

“가을은 벙어리같이 슬픈 때다.

그저 성가시게 어디론가 가고 싶어서

길을 떠난다. 당분간 편지 말아라”

 

 

벗은 아마도 어느 날 아침 이러한 엽서를 받았을 게다.

사실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회합(會合)과 방문(訪問)과 약속과 출근부(出勤簿)의 감시에서 풀려서 길을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호주머니 속에 다만 기차 시간표와 약간의 현금을 쑤셔 넣고 도망하는 것처럼 기차를 잡아 탔다.

나는 차창에 기대어 오래간만에 철교의 근방에 엉클려 선 백양(白楊)나무 숲에 눈을 빼앗겼다.

그리고 푸른 하늘로 향하여 팔을 벌린 그 나뭇가지들의 방향에서 무한(無限)에로 타는 나무들의 생명의 의지를 본다. 일찍이 ‘다다’ 의 한 사람은 한 종이 위에 한 방울의 잉크를 떨어뜨리고는 ‘성모 마리아’ 라고 화제(畵題)를 붙인 일이 있다. 당시의 파리 사람들은 그 그림 앞에서 오직 조소(嘲笑)와 경멸(輕蔑)을 감추지 못했다.

어떠한 시대에도 범인(凡人)의 눈은 낡은 질서에 대한 새로운 정신의 타오르는 부정의 불길에 대하여 가엾은 환쟁이임을 면치 못한다.

그 반역(反逆)의 정신을 설명하는 것은 오직 생명의 말뿐이라는 것을 나는 가치 속에서 우연히 느꼈다.

한동안 서울의 시민들은 권투에 대하여 거의 탈선적(脫線的)인 열광(熱狂)을 보인 일이 있다. 그래서 권투 구경이라고만 하면 삽시간에 회장은 초만원이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흑인 보비의 이름은 실로 나폴레옹의 이름에 필적(匹敵)했다. 얼마 동안 나는 이 현상의 원인을 몰라서 흥미를 가지고 생각해 본 일이 있는데, 역시 기차 속에서 갑자기 그것을 깨달았다.

즉 권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다른 경기보다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치열한 육체와 육체의 충돌에서 발산(發散)되는 생명의 불꽃의 이상한 매력에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피로한 도시인의 생명적인 것에 대한 향수가 그들의 권투 열에도 숨어 있나 보다.

거기에 환경에게 억압된 투쟁 본능의 부단(不斷)한 발효도 그 한 원인일 것은 물론이다.

우리문단(文壇)에서는 평론이라는 것은 우선 싸움이 아니면 아니 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이러한 곳에들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멀리 마을에서 엉성한 나무다리가 엎드려 있다. 그것은 마치 엔진에 끌려가는 소란(騷亂)한 근대 문명을 조소(嘲笑)하는 듯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오래인 다리의 (倨慢)을 책망(責望)할 아무 근거도 그 순간에는 준비하지 못했다.

나는 새삼스럽게 쉴 새 없이 문명에게 쫓겨 다니는 도시인의 생활에서 피로의 빛을 찾은 것 같다.

딴은 거리를 몰려다니는 그들의 얼굴에는 활기가 흐른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활기인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긴장의 가면(假面)인 것 같다.

달리는 전차나 자동차는 물론 신문 배달도 교통 순경도 아이스크림 장수도 타이피스트의 손가락도 모두 긴장해야만 산다.

그러한 활기는 우거진 풀숲 속에서 식물의 종죽들과 벗하여 사는 사람들의 혈관 속을 흐르는 활기와는 다른 것 같다. 하나는 자연 그 속에서 뿌리를 박았고, 다른 하나는 삐뚤어진 문명에게 시달리는 자의 주의의 연속이 꾸며 내는 활기의 추세인 것 같다.

여행은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서 나로 하여금 이렇게 한 사람의 생명 찬미론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단상(斷想)들에 대하여 다른 때의 글에서와 같이 엄숙하고 싶지는 않다. 왜 그러냐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가볍기를 바라는 나의 여행에 그처럼 무거운 책임을 지우기는 싫은 까닭이다.

그것은 때대로 얘기하지도 않았던 신기한 감격이나 인상이나 사색의 단서를 공급하기도 할 것이다. 다만, 그러한 것을 나는 여행에 대하여 기대한다. 그 이상으로 ⌜자본론⌟이나 ⌜논어⌟에 대한 것과 같은 일을 여행에 향하여 바라지는 않는다.

길을 가는 마음은 다만 시를 읽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