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孔雀) / 백금태
공원의 넓은 잔디밭과 꽃 위로 는개가 내리고 있었다. 허둥거리며 긴 다리로 성큼 성큼 도망가는 타조, 두 귀를 쭝긋거리는 사슴들, 인기척에 놀란 공작이 두 눈을 되록거리며 꽁지를 펼친다. 화려한 문양을 수놓은 커다란 부채가 오색찬란하게 반원을 그린다. 공작은 화려함을 과시하려는 양 꽁지에 팽팽하게 힘을 가한다. 훨훨 날지도 못한 채 꽁지에 온 힘을 모으며 용을 쓰는 공작을 안쓰러운 듯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의 결혼식은 눈부셨다. 그 지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재력가의 막내아들 결혼식답게 화환으로 치장된 식장은 번들번들 윤기 나는 사람들로 발 들여놓을 틈이 없었다. 보석으로 장식된 드레스는 행복에 겨워 웃고 있는 그녀를 더욱 더 화려한 신부로 만들었다. 친구들의 부러움과 선망의 눈길이 그녀의 손에 들려진 하려한 장미 부케로 옮겨갔다. 우리구두가 신데렐라를 만들어 주었듯이 친구들도 그녀처럼 눈부신 신부의 행운을 꿈궜다. 그녀가 되돌아서며 친구들을 향해 부케를 힘껐 던졌다. 부케는 포물선을 그리며 내 가슴에 안겼다. 친구들의 실망과 부러움의 눈길이 따갑게 내게로 쏟아졌다.
그녀는 산골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몇 뙈기 안 되는 논밭을 일구며 3남 1녀를 키웠다. 그녀는 장녀였으며 무척 영리했다. 그녀가 희망이었던 부모님은 주린 배를 움켜쥐면서 그녀를 도시의 대학에 유학을 보냈다.
대학 생활 2년 째 접어들던 어느 봄날, 그녀 앞에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났다. 미팅에서 그 남자를 만났던 것이다. 성악을 전공하는 음악도에다 용모도 준수했던 그는 순진한 시골 처녀를 어렵지 않게 사로잡았다. 그에 비하면 그녀는 예쁘장한 얼굴밖에는 내세울 게 없었다. 하지만 어떤 조건도, 어떤 장애물도 그들의 불같은 사랑 앞엔 완전 연소가 되어 재로만 남을 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축복과 부러움을 한 아름 안고 그 남자의 배에 동승한 채 항해를 시작했다.
부잣집 마님으로 모습을 바꾼 그녀와의 만남은 점점 더 소원(疏遠)해져 갔다. 왠지 나보다 한 등급 위의 부류로 느껴지는 거리감과 위화감이 우리를 갈라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아침부터 는개가 내렸다. 나는 서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빌딩도, 차도, 길도 는개 숲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언뜻 옆을 스쳐 가는 여인이 있었다. 나는 자석에 끌린 듯 고개를 돌렸다. 물방울 무늬가 점점이 박힌 하연 원피스를 입은 그녀도 몸을 돌렸다. 둘의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탄성을 지르며 손을 맞잡았다.
우리는 가까운 공원으로 갔다. 꿈 많던 이십대에 둘이서 거닐곤 했었던 도심 속의 공원이었다. 가슴속에 쌓아 두었던 그 시절의 아스라한 추억을 꺼내 보고 싶었다. 우리는 공작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마침 공작이 꽁지를 활짝 펼치며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때도 공작은 지금처럼 멋진 모습을 보여 주었었다. 우리는 손뼉을 쳤다. 하지만 그녀는 잠잠했다. 화려하게 펼쳐진 아름다운 공작의 꼬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서는 힘들었던 삶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남편이 교통사고를 냈다. 남편은 길가에 세워 둔 승용차와 담벼락을 박살낸 후 뺑소니를 친 것이다. 남편의 옆자리엔 그녀가 아닌 딴 여자가 않았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황소바람이 쓸고 간 그녀의 가슴은 생채기로 너덜거렸다.
그녀의 달콤한 신혼 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남편은 성악 전공을 접고 도심에 제법 큰 규모로 악기사를 열었다. 부자 부모를 둔 덕이었다. 남편의 사업은 승승장구를 했고 그녀의 삶도 활짝 펼친 공작의 깃처럼 화려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남편의 귀가는 늦어지기 일쑤였고 남편과의 대화도 점점 더 소원해져 갔다. 남편의 차에서 다른 여자의 소지품이 종종 눈에 띄곤 했지만 남편은 대수롭잖게 얼버무리곤 했다. 그녀도 더 이상 캐묻고 싶지 않았다. 다른 여자를 입에 올리는 순간 그녀의 행복은 파랑새처럼 멀리 날아갈 것만 같은 불안감이 앞섰다.
부인(否認)하고 싶었던 일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남편은 용서를 빌었다. 날이 갈수록 남편의 용서는 횟수를 더해 갔고 그녀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갔다. 그래도 그녀는 남편을 놓을 수가 없었다. 결혼식장에서의 행복했던 순간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입혀진 선망과 부러움의 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체면과 자존심으로 버티어 나갔다. 끓어오르는 분노는 가슴을 새카만 숯덩이로 만들다 못해 뇌마저 뒤흔들며 우울증이란 병마를 끌어들였다.
어느 해였던가, 그녀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돛단배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느냐며 넋두리를 늘어놓았었다. 나는 호강에 겨운 듯한 그녀가 얄미웠었다. 돛단배가 아닌 호화로운 유람선에서 와인 잔을 기울이는 그녀만이 보였었다. 나는 그녀의 외로움을 외면해 버렸었다.
오늘 몸과 마음이 너덜거리는 그녀를 만났다. 깃 뒤에 숨겨진 공작의 애환. 날개보다 서너 곱절 더 긴 꽁지를 짊어진 채 뒤뚱거리는 공작. 새털처럼 가볍게 비행하고 싶으리라 선망과 부러움과 화려함 속에 갈진 그녀의 고통. 체면으로 치장된 두꺼운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싶다는 그녀. 우리에 갇힌 채 하려한 척 허세 부리는 공작의 삶이 바로 그녀의 삶이었다. 는개 속에 펼쳐지는 공작의 묘기에 서글픔이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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