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하면 만나게 된다 / 성낙향
주방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 가사 한 구절이 귀를 파고들었다. 날마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의 지겨움을 이빨로 깨물며 거품이 부걱거리는 수세미로 왈각달각 그릇을 닦던 중이었다.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가기를….”
순간, 분주하던 손가락의 놀림이 딱 멈췄고, 심장이 무언가에 관통당한 느낌이 들었다. 계속 이어지는 노랫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라디오에 집중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내가 서 있는 세상이 왠지 낯설어 보였다. 손에 들고 있는 노란 망사수세미,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포개진 대접들, 발치의 넘칠 듯한 쓰레기통…. 주변의 모든 것이 이전과 똑같았지만 틀림없이 뭔가 달라져버린 세상에 서 있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승철이 부른 노래 <네버 엔딩스토리>였다. 워낙 방송을 많이 탄 노래라 멜로디는 이미 귀에 익숙해 있었다. 사실, 들을 때마다 멜로디가 아름답다는 생각, 이승철이란 가수 정말 절창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다시 듣고 싶다거나, 시디를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의 감동이 북받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웬만큼 들어서 이젠 식상할 수도 있는 그 노래가 어느 날 오전, 느닷없이, 소스라칠 듯한 아름다움으로 나를 옴짝 못하게 포박하고 말았다. 싱그러운 잎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아마릴리스에서 불현듯 우아한 자주색 꽃송이가 피어난 걸 목도한 심경이랄까.
그 노래의 가사 속에 그런 구절이 있는 줄은 그날 처음 알았다. 유행하는 대중가요를 나는 주로 라디오를 통해서 접한다. 일부러 찾아 듣기보다, 버스 안이나 도심의 로드숍에서 틀어놓은 노래를 다른 일을 하는 와중에 건성으로 듣곤 했다. 그 때문에 가사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튼, 머리맡에 달려있는 라디오 덕분에, 또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손가락만 놀리고 있었던 덕분에 그날은 노래 가사가 선명하게 내 귀에 와 닿았고, 한 줄의 가사가 주는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움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대중가요의 노랫말은 가볍고 통속적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가수가 무슨 단어를 발음하는지 모호해도 굳이 알려고 들지 않았던 것은 노랫말의 단어나 구절들이란 굳이 새겨서 들어야 할 만큼 의미로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단숨에 무너졌다.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가기를….”
정지버튼이 고장 난 카세트 같은 몸 안에서 이 한 구절은 무한 반목으로 재생되었다.
그리움은 날 선 칼처럼 예리하다. 그것은 품을수록 제 가슴을 깊이 베지만 어쩌면 찾아올지도 모를, 아니 그러리라고 믿는 삶의 경이로운 어느 순간을 기다리기에 그 지독하게 고독한 감정을 껴안고만 있을 뿐, 함부로 내려놓지 못한다. 그런 바보 같은 이의 순정한 마음이 내 어깨를 치고 간다. 낮잠에서 개어난 한낮, 길 아래 학교에서 울려오던 아련한 차임벨처럼.
넋두리를 늘어놓거나 호들갑스럽지 않아서 좋다. 간절한 그리움의 깊이가 느껴지는 문장을 한번 쓰윽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해지는데, 이 가사를 절창의 가수가 혼신을 다해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 이따금 우리에게 축복처럼 주어지는 삶에의 감동에 가슴이 그만 미어진다. 그리고 그 감동을 거듭 확인하고 살아간다.
이승철이 노래한 것처럼 내 기억 속 영화의 주인공들은 분명 그랬다. 그리움을 간직한 채 헤어져 살아간다던 연인들은 뜻하지 않은 시간,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꼭 한번은 다시 만났다. 작위적인 것 같지만 그런 만남이 억지스럽지 않은 건,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 속에는 그리움의 대상을 끌어당기거나, 그에게 가닿으려는 자성이 강하게 깃들어 있음을 통감하기 때문이다.
그리워하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그런 연인들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 영화가 있다. 장만옥과 여명이 주연한 <침밀밀>이 바로 그것.
서로의 소식을 모른 채 각자 홍콩을 떠나 뉴욕에서 새 삶을 살아가던 이교와 여소군. 사랑했으나 이별해야 했던 두 사람. 그들은 긴 세월이 흐른 후의 어느 날, 뉴욕거리의 한 전자대리점 앞에서 거짓말처럼 조우한다. 서로의 추억 속에 특별하게 자리한 가수 등려군이 사망한 날이었다. 이국의 TV수상기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사망소식과 추모곡에 이끌려, 길 가던 두 사람이 차례로 한자리에 걸음을 멈춘 것이다.
이교는 알고 있었을까. 그리워하면 만나게 된다는 걸. 너무도 뜻밖의 재회였지만 그녀는 마치 며칠 만에 다시 만난 것처럼 여소군에게 환한 미소를 보냈다. 그런 이교를 또 가만히 바라보던 여소군의 블랙홀 같은 검은 눈동자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우리에게도 애태우며 그리워했던 사람이 한 사람쯤 있었다. 이승철이 불러주는 이 한 줄의 노래는 잡다한 일상 속에 묻어놓고 살아가던 예전의 그 주체 못할 그리움의 설렘과 가슴앓이를 속절없이 떠올리게 한다. 윤곽이 뭉개진 중년의 체형에 어울리도록 질펀한 군살을 드리운 채 늘어져 있던 내 감성은 세월 저편의 그리움 속에 머물고 있는 그 누군가의 목소리라도 들은 듯 화들짝 놀라, 한순간 시골처녀 같은 눈으로 세상의 해묵은 풍경들을 둘러보았던 것이다.
닻처럼 가슴에 걸린 노랫말 한마디 때문에 이승철의 <네버 엔딩스토리>는 그 하루 온종일 나를 떠나가지 못했다. 놓아 보내는 데 좋이 며칠은 걸렸으리라. 그날 이후로는 대중가요를 들을 때면 최대한 꼼꼼하게 가사를 챙긴다. 내가 허투루 지나친 또 다른 보석 같은 가사는 없었는지, 내 감성을 또 한 번 송곳처럼 꼿꼿하게 만들 그런 가사가 나오지는 않을는지 시구에 눈을 모으듯, 노래에 귀 기울인다.
성냑향 수필집 <염장다시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