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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고리 / 류창희

고리 / 류창희

 

 

 

나팔꽃은 아침을 열어주는 꽃이다. 꽃에선 맑은 기상 나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팔꽃 줄기가 올라갈 수 있도록 줄을 매어 준다. 제 스스로 잘 자라고 있는데 믿지 못하고 자꾸만 뭔가를 받쳐 주고 싶다.

나팔꽃을 닮은 사춘기의 아이는 방황했다. 몸은 컸지만 어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어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교복에 갇혀 머뭇거릴 뿐이다. ‘나 여기 있소’ 소리치면 ‘다 알고 있다’고 윽박지른다. ‘왜 돈을 낼 때만 성인 요금을 다 내고 혜택 받는 자리에서는 기회를 안 주느냐’고 항의를 한다. 틀에서 벗어날수록 나무랐다.

아이는 끊임없이 방법을 바꿔 가며 자신을 표현했다. 시위하듯 베이스 기타를 침대 밑에 깔고, 머리에 무스를 발라 자존심을 세우더니 못 본 체하니 그냥 박박 밀어 버렸다.

의지할 곳은 자신밖에 없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이웃 아낙들이 수근대다 내가 다가가니 하던 말을 멈춘다. 앞 동의 어느 여학생의 이야기로 말꼬리를 돌리며, 댁의 아들 참 잘생겼다고 한다. 난데없이 왜 우리 아들이 잘생긴 대열에 들었을까.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님은 하루 종일 누워 계셨다. 다른 말씀 없이 너무 오래 살았다고만 하신다. 무슨 일인가. 버스 안에서 손자를 만났는데 할아버지를 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더라고 했다. 더구나 턱에다 장신구를 달았다며 집안이 망한다고 하셨다. 사내 녀석이 신체를 훼손시키면서 멋 내는 꼴을 어찌 보시겠는가.

손자는 할아버지 앞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날 나는 아이에게 밖에서 똥싼바지(힙팝바지)를 입고 다니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날아다니든, 일단 동네에 들어올 때는 학생답게 하라고 혼쭐을 냈다. 그 즈음부터 아이는 차츰 식구들과 눈 맞춤을 피하고 말수가 적어졌다.

끼를 발산하지 못해 끙끙 않던 열정을 미술학도의 꿈으로 돌렸다. 밤늦도록 4B연필과 씨름하다 돌아오면 굴뚝강아지처럼 얼굴과 손이 새까맣다. 그런 날은 침대에 누워 깊은 잠 속에 빠져 들었다.

진작부터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시켰더라면 별난 짓을 안 했을까. 가엾은 생각이 들어 자는 아이 엉덩이를 토닥였다. 입이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반짝! ‘아니, 저 입 속의 금속은 대체 무엇인가?’ 눈썹, 귀, 코, 입, 턱의 언저리에 장신구를 하거나 문신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다. 그 말로만 듣던 피어싱(piercing)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곳은 쓴맛을 감지하는 부위이다. 자신의 욕구를 혀 속에 깊이 감춰 주고 외롭게 고통을 감수하고 있었다.

“너! 아빠 앞에서는 절대로 하품하지 마.”

아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고리를 거는 일은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한 수단이다.

나팔꽃의 또 다른 이름은 견우화(牽牛花)다. 소 치는 아이가 코뚜레를 걸어 소를 끌고 견인해 가듯, 싹이 자라면 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덩굴손이 스스로 고리를 건다. 당연한 이치를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막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나도 학문에 적을 두고 싶어 했으나 의지력이 부족한 탓으로 비켜서 있다. 문학이 보약이라 여기며 어쭙잖게 글에다 고리를 걸고 있다. 싹이 튼실하지 못하니 끊어질듯 위태롭다. 담장에 피어난 나팔꽃마냥 남의 집 뜰 안만 기웃거린다. 그러다 굴 속에 풍덩 빠져 유유자적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산소 학번(02학번)으로 디자인학부에 들어간 아이는 요즘 과제물로 거의 밤샘을 하다시피 한다. 아이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넘넘 행복하다”는 글이 자주 올라온다. 주고받는 친구들과의 대화글이 산소처럼 맑다. 집에서도 싱글벙글이다. 혀 속의 고리 다위는 이제 없는 듯하다. 또 다른 어느 은밀한 곳에 고리를 걸었는지.

내가 삶의 가치를 문학에 걸어보듯, 아이는 미술에다 걸었을까 난 아들하고 한편이다. 내 아들의 ‘보헤미안’ 기질을 사랑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복만큼의 행복이 어디 또 있을까. 지나온 세월을 나팔꽃처럼 곱게 피워 내고 싶다. 꽃송이가 짐이 된들 무거울 것 같지는 않다.

사색의 덩굴에 고리를 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