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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고향집터 감나무 / 이광치

고향집터 감나무 / 이광치  

 

 

 

이제 고향은 타향이나 다를 바 없다.선산이 있었기에 마지못하여 일 년에 한 두번 찾아가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젊은이들을 도시로 다 떠나보내고 폐허로 남은 텅 빈 집터와 주름진 얼굴 몇 분을 대하면 고향이라기보다는 허물어진 옛 성터 같은 느낌이 든다.언젠가는 인적마저 끊어져서 아무도 살지 않을 땅처럼 안타깝다.

자연히 인심도 변해 있다.이웃간에 서로 주고받던 예전의 훈훈한 인정은 간 곳 없다.옛 정을 생각해 집안으로 한 번 들어가 보면 조바심이 먼저 가슴에 와 닿는다.도회의 빌딩숲 속에서 문득문득 느꼈던 향수가 삭막감으로 변하니 서글프다.

그래도 내가 살았던 집터가 남아 있어 위안을 얻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물려받아 내 나이 서른다섯을 채울 때까지 웅거하며 자식 넷을 낳아 기르다시피 했으니 따지면 삼대의 유산인 셈이다.

이십여 년 전 내가 고향을 떠날 때 토담으로 쌓아올린 초가집이 왜 자꾸자꾸 뒤돌아보였는지…… 황혼을 등에 지고 정처없이 떠나가는 나그네의 심정으로 초가지붕을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았다.그 후 몇 해 못 가 초가집은 무너져서 집터만 남게 되었다.

내가 도시의 밑바닥을 배회하며 사는 동안 고향에 집터가 있는 사실은 늘 무관심 속에 던져진 채였다.그러는 사이에 고향 마을에서는 우리 집터를 두고서 논란의 대상 거리가 되었다.이웃들이 서로 채마밭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다투기도 하고, 퇴비장을 만들어서 자기의 땅처럼 권리를 행사하기도 했다.이 틈바구니에서 감정이 꽤나 상한 누구는 우리 집터를 아예 사겠다고 나섰다.

만약 아내의 말대로 임자가 생겼을 때 집터를 팔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당시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로 시골의 땅값은 볼품이 없어,그 돈이 살림에 보탬되기보다는 분수없는 기분으로 불고깃집에서 술 몇 잔을 마시고 얼큰히 취해 나오면 돈도 없어지고 집터도 없어지는 낭패를 보았을 것이 십중팔구였다.지금 생각하면 그 상황을 잘 피했다.

물론 지금도 집터가 버려져 있기는 마찬가지이다.이웃의 채마밭이고,거름자리에 불과하다.그렇지만 모처럼 고향을 가서 한 번 둘러보면 예전에 내가 살았다는 여운이 남아서 위안이 되어준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업도 중요하지만 내 자신이 자식 넷을 낳아 기른 터전이 남아 있다는 의미는 비록 버려진 집터일망정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그것을 꼭 어찌 돈 몇 푼으로만 계산하겠는가?

무엇보다도 주인 잃은 집터를 묵묵히 내려다보며 파수꾼처럼 서 있는 세 그루의 감나무를 대하면 나를 잊지 않고 반겨주는 무언의 기다림이 거기에 있었음을 깨닫는다.고목이 된 한 그루는 집터를 처음부터 지킨 주인이었고,두 그루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직접 접붙이기를 해서 키웠다.

철부지로 사물의 이치를 깨닫지 못 할 때 나는 다 큰 고욤나무를 싹둑 잘라내고 손가락 길이만도 못한 감나무의 잔가지를 끊어 접을 붙이는 아버지가 잔인해보였지만 몇 년 후에 감이 달리는 것을 보고서야 그 원리를 터득했다.

감나무는 고욤나무에 뿌리를 빌리는 대신 씨앗을 제공해 준다.감씨를 심으면 감나무가 아닌 고욤나무가 올라온다는 사실은 은혜를 은혜로써 갚아 주는 응보였다.종속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몸을 잘라 감나무에게 바쳐야 하는 고욤나무와 열매를 거두고서도 그 씨앗을 고욤나무에 빼앗기는 감나무가 서로의 인과 관계를 맺지 않았다면 어느 한쪽인들 온전하게 존속했겠는가.

아버지가 접붙이기한 감나무들이 한창 무성할 시기에는 초가지붕을 마구 덮어서 이엉이 잘 썩는다는 트집도 많이 잡았다.매년 한 차례씩 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갈아 덮을라치면 새로 뻗어 나온 가지들이 그늘을 만들어서 그 밑으로는 골이 깊이 패였다.쭉쭉 뻗은 가지들은 뚝뚝 꺾어 없애버려도 이듬해가 되면 또 햇순들이 더 거세게 뻗어 나온다.거름이나 비료를 줄 필요 없이 쳐다보기만 하면 쑥쑥 자라나는 것이 감나무였다.

고욤나무에 접붙이기를 해서 연약한 첫순이 돋았을 때는 저것이 언제 자라서 감이 열리나 하는 의문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눈초리도 한갓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았다.

감꽃이 피는 늦은 봄이면 때아닌 눈송이들이 밤사이에 내린다.아이들은 아침에 눈두덩을 비비며 바쁘게 감나무 밑으로 쫓아가서 감꽃을 실에 꿰어 목에 걸고는 큰 자랑거리인양 으스댔다.그 어리광은 티없이 순진한 동심이었다.텔레비전도 없고,장난감도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물리적인 어떤 매체나 기구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이 주는 섭리에 그대로 동화되었다.

여름에는 활짝 피어난 푸른 잎이 그늘을 두껍게 한다.일터에서 돌아와 자리를 깔고 누우면 매미가 가지 사이에 숨어서 울었다.그늘이 좋아 여름 낮잠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삼복 더위는 물러나고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정말 그때 감나무는 나무이면서 우리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어느 날 갑자기 감나무가 베어져 없어졌다면 집 주변이 얼마나 허전했겠는가? 감이 익어가는 정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초가지붕 위에 주렁주렁 달린 감이 없었다면 시골의 정취가 담긴 한 폭의 그림을 누가 그렸겠는가.

바로 그 감나무는 주인을 잃고 빈터에 쓸쓸히 남게 된 뒤에도 자기의 할 도리를 잊지 않았다.봄이면 잎과 꽃을 피웠고 여름이면 조금도 다름없이 넓고 푸른 잎으로 빈 집터에 그늘을 만들었다.가을이면 주인을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아무에게나 열매를 따가도록 맡겼다. 임자도 아닌 사람이 마음대로 다 익은 감을 따갈 때 주인을 위하여 잎을 피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달았던 속마음이 오죽 서운했겠는가! 주인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겠지…… 그러면서도 세세연년 오늘날까지 빈 집터를 지키면서 꽃을 피웠다.또 내년에도, 먼먼 그 훗날에도 잊지 않고 꽃을 피울 것이다.

아버지께서 당신 당대만을 생각하셨다면 고욤나무를 키우고,그것을 미련없이 잘라서 접을 붙일 이유는 없었다.먼 훗날을 내다보며 후손을 위해서 하신 일로 감나무는 그렇게 서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삼십여 년이 된다.감나무에 꽃이 피는 한 아버지는 결코 돌아가시지 않으셨다.그 숨결이 감나무에서 흐른다.

 

 

- 2000 농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