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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오래된 미래 / 이윤기

오래된 미래 / 이윤기

 

 

 

나는, 내가 일본식 음식점이 내어놓는 생선회 같은 음식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일하고 있을 당시에는 글 친구들과 어울려 일본식 횟집을 자주 다녔다. 그런데 생선회를 좋아한다면 바닷가에서 파는 신선한 생선회도 좋아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집에서는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인가? 40대 후반, 나는 내 몸과 마음에 고정되어 있는 생각들을 하나씩 점검해보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생선회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생선회가 아니라, 생선회를 주문하면 따라 나오는 덤 요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흔히들 이 덤으로 따라 나오는 요리를 일본말로는 ‘쯔케타시’ 라고 하는 줄 아는데 사실은 ‘쯔케타리’ 가 정확한 일본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쯔케타리’ 가 좋아서 횟집을 자주 출입하면서도 생선회를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나는 세계에서 고풍스럽기로 이름난 곳을 찾아다니기를 좋아한다. 미국에서 가장 고풍스러운 도시는 단연 보스턴이다. 어떻게 생긴 도시인지 궁금해서 내가 살던 곳에서 자동차로 18시간이나 걸리는 보스턴을 이웃집 나들이하듯이 다녀온 적도 있다. 중심부 맨하튼의 스카이라인이 백 년 전에 지금 꼴을 갖추었다니까 뉴욕도 고풍스러운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내 살던 곳에서 자동차로 14시간이나 걸리는 그 뉴욕을 나는 십수 차례나 다녀온 적이 있다. 보스턴이나 뉴욕 같은 도시의, 고풍스러운 호텔 바에서 맥주 마시는 것도 나는 좋아한다. 보스턴의, 2백 년 전에 지어졌다는 한 호텔에서는 포도주를 막걸리 마시듯이 여러 병 마시고 속이 쓰려 애를 먹은 적도 있다.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현대인이 누릴 수 있는 사치를 나는 두루 누려 보았다. 파리하고도 생 제르맹 데 프레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소설가 헤밍웨이의 단골집이었던 것으로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식사와 음주를 즐긴 적도 있다. 이탈리아의 로마와 그리스의 아테네를 누비면서 나는 나그네에게 허용된 사치를 마음껏 누리기도 했다.

오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덧붙이거니와 나는 눈과 혀의 사치만 누린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수많은 학자들과 먹고 마시면서 토론하는 사치도 두루 누렸다. 파리에서는 파리의 예술가들과 밤새 마시고 밤새 떠들어댄 적도 있다. 영국 런던의 한 레스토랑에서는 남의 농담에 잘 웃지 않기로 유명한 영국인들을 유쾌한 미국식 농담으로 ‘뒤집어지게’ 한 경험도 있고 그리스에서는 그리스 신화에 정통한 그리스 학자를 이겨먹기도 했다. 40대 중반에서 50대 중반에 걸친 시기에는 나에게 뒤늦게 찾아온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그런데, 덤 요리가 나오지 않는 생선횟집에서 그랬듯이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나는 큰 행복은 누려보지 못했다. 나는 내 몸에 벤 고정관념을 또 한 차례 점검해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마음이 실로 마땅히 머무는 데가 어디냐.

해마다 한식이 되면 내가 찾는 곳이 있다. 조상의 묘소가 있는 내 고향의 선산(先山)이다 높지도 않다. 높이가 해발 한 2백 미터나 될까? 넓지도 않다. 다 해봐야 3천 평을 님지 못한다. 내가 고향을 떠나온 것은 47년 전이다. 고향에 살고 있는 , 지금은 연세가 아주 많아진 분들은 지금도 나를 47년의 나로 기억하고 나의 아명(兒名)을 부른다. 그들은 내가 어느 학교에서 어떤 공부를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이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학교에서 굉장히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 정도다. 그래서 마을 노인 중 한 분은 남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미국의 와세다 대학 출신’ 이라고 한다. 나는 내 고향이 좋고 이런 분들이 좋다. 그들은 장본인인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내 어린 시절 일을 알고 있다. 그들은 반세기 전에 세상을 떠난 내 조모와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방대하게 내장하고 있다. 나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곳이 초라한 내 고향 선산 자락이라는 것을 알았다. 반세기 전 내 조부모와 부모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아득한 신화가 되어 있는 곳이 바로 내 고향이다.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일찍이 금치산 선고가 내려진, 그래서 지금은 조금도 유효하지 않은 고대 신화에 그토록 집착하느냐고 묻고는 한다. 인류의 문학 유산이 중세와 근 ․ 현대를 지나면서 얼마나 풍부해졌는데 어째서 아직까지도 천 년 2천 년 전의 이야기에 매달려 있느냐고 묻고는 한다. 역사의 달빛에 젖어서 신화가 된 이야기들을 더 좋아한다.

3년 전부터 나는 시골집 텃밭에서 농사를 짓는다. 대부분이 농업 종사자들인 마을 사람들은 나를 자주 놀려 먹는다. 농약도 안 쓰고, 배료도 안 쓴다고 나를 놀려 먹는다. 비닐을 깔고 그 위에다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꽂는 그 흔한 농법도 내게는 쥐뿔이다. 나는 천 년 전, 혹은 2천 년 전 사람들처럼 농사를 짓는다. 그래도 먹을 것이 남아돈다. 물론 농사일이 나의 생업이 아니기는 하다. 따라서 경제적인 효율에서 비교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나는 천 년 전 혹은 2천 년 전 이야기를 읽어야 행복감을 느끼듯이 천 년 전 혹은 2천 년 전 사람들처럼 농사를 지을 때만 행복감을 느낀다.

내가 여행했던 무수한 나라 내가 지나쳤던 무수한 도시들은 천천히 내 뇌리를 떠나고 있다. 그 자리에 내 삶의 중심인 고향의 선산 자락이 들어서고 있다. 고향의 선산 자락은 변하지 않는다. 신화도 변하지 않는다. 흙도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래된 미래’ 이기도 하고 ‘장차 올 과거’ 이기도 하다. ‘예스터- 모로(yester-morrow)’, 어제와 내일이 혼재하는 시제(時制)를 나는 살고 싶어한다. 그렇게 살면서 어제와 내일의 이음매가 되고 싶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