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짐 / 김희자
묵정밭이 늘어진 골을 지나 재를 오른다. 빈 가지로 서 있는 나무들이 처연하다. 우리네 인생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앞서 가는 아버지의 등이 텅 비어 있다. 세월에 부대끼고 풍상에 시달린 등은 꼿꼿하던 자존심마저 누그러뜨린 듯 구부정하다. 빈 등에는 두 손이 동그랗게 올려 져 있다.
나는 허락도 없이 아버지의 뒷모습을 훔쳐본다. 뒷짐을 진 바른손이 왼손을 감싸 안고 있다. 누가 보아도 여유로운 모습이다. 젊은 날 이 고개를 오르내리며 등에 졌던 지게도 없고 세월의 등짐도 고스란히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구멍이 숭숭 뚫린 뼈마디의 등허리로 세상을 업고 간다. 뒷짐 진 아버지의 둥근 모습에서 세상의 이치를 배운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올곧고 고집이 셌다. 모두들 입을 모아 농사지을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이장, 새마을 지도자, 대의원까지 하신 아버지는 개척정신이 강해 농사보다 바깥일이 더 어울렸다. 젊은 날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탓하며 좌절의 늪에 빠져 술로 세월을 달래었다. 가장의 자리를 망각한 채 술에 전 몸으로 감나무 아래 쓰러져 있기도 하였다. 그런 아버지를 헤아리지 못한 나는 마음을 트지 못하고 모난 마음을 품고 살았다.
한창 꿈을 키울 사춘기 때였다. 나는 상급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성적이었으나 형편상 진학을 포기하였다. 주경야독을 할 작정으로 낯이 선 도시로 나왔다. 이끌어 주는 이가 없어 홀로 가는 길은 아득하고 외로웠다. 모든 것이 무책임한 아버지의 탓이라고 넘겨씌웠다. 그 당시 축산업에 손을 댄 아버지는 소 값 파동으로 큰 빚을 안게 되자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며 술독을 끌어안고 살았다. 착잡한 아버지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보잘것없는 딸이라 관심이 없다고 여겼다. 속내를 숨긴 채 술을 가까이했던 아버지를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가정을 꾸리고 마흔 줄에 이르니 부녀지간에 두는 거리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알게 되었다. 사리에 눈을 뜨고 보듬는 법을 터득하면서 마음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모난 마음을 갈아 둥글게 품는 연습을 하였다. 애써 손 내밀어 아버지의 손을 잡았고 내 마음을 보냈다. 한 해, 두 해가 흐르자 속내가 드러나지 않던 아버지의 정이 차츰차츰 느껴졌다. 아버지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분별이 서지 못한 나의 일방적인 생각이었음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소원해서 내 안에 머물던 마음이 둥그레졌다.
지난해 가을, 몸이 쇠한 아버지는 경운기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언덕길에서 넘어졌다. 등뼈에 금이 간 아버지는 옴짝도 못하고 병상에 눕게 되었다. 큰언니가 다시는 농사일을 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두 눈을 꼭 감았다. 평생토록 일군 터전이 묵정밭으로 버려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는 탓이었으리라.
하룻밤이라도 치성으로 간호하며 마음을 트고 싶어 피붙이들은 모두 보냈다. 좁다란 보조 침대에 누워 있으니 아버지의 신음이 들려왔다. 소변기를 찾아 뒤척이는 소리에 몇 번이나 일어났다. 산수(傘壽)에 이른 연세이니 배뇨장애가 없을 리 만무하다. 시원치 않은 배뇨 탓에 소변을 보는 횟수도 잦고 변기를 비우려면 기다림 또한 필요했다. 밤이 깊어지자 진통제를 맞은 아버지의 앓는 소리는 점점 옅어져 갔다.
새벽에 눈을 뜨니 소변기가 제법 차 있었다. 깊게 잠이 든 나를 위해 기척을 내지 않고 몇 번이나 소변을 본 것이다. 변기를 비운 후 몸을 닦아 드릴 요량으로 수건을 적셨다. 침대 옆으로 바투 다가서니 아버지의 코와 내 코가 닿을 것만 같았다. 늘 높기만 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아버지였다. 원망만 했던 아버지의 노쇠한 얼굴은 광대뼈만 앙상궂고 물기라곤 없어 까칠하였다. 어릴 적 다리를 밟아 드린 적은 있었지만 소세를 돕는 건 처음이다. 세월은 아버지의 얼굴을 비껴가지 않고 골을 남겼다. 그 곧던 성격도 세월에 깎여 둥글둥글해졌다.
골진 세월을 펴 주기라도 하듯이 얼굴을 닦고 또 문질렀다.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아버지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웃으셨다. 나는 미소에 답례라도 하듯 살며시 웃다가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틀니를 뺀 잇몸은 비어 있고 대문니 하나만 아버지의 자존심처럼 우뚝 드러나 있었다. 미라처럼 앙상하게 마른 몸은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순간 아버지의 흐린 눈과 물기가 도는 나의 눈이 마주쳤다. 눈자위에 맺히는 이슬을 감출 수 없어 나는 딴청을 피웠다.
병실을 떠나오기 전 아버지의 어깨를 살포시 감쌌다. 아버지도 중년이 된 여식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버지의 가슴에 내 가슴이 닿는 순간 얼었던 봄눈이 녹아들 듯 굳었던 마음도 풀어졌다. 중년이 되고서야 안겨 보는 그리운 품이었다. 젊은 날 풍성하던 가슴은 빈약해졌지만 처음 안겨 보는 품은 햇솜 이불처럼 포근했다. 기억을 더듬어도 아버지의 품에 안겨 본 적이 없고 멀게만 느껴졌던 가슴이었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를 다 안을 수 있었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 또한 있는 법이다. 아버지의 완고함 뒤에는 여린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그 여린 마음 때문에 자신과의 싸움에도 약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세월은 잔잔한 바람결처럼 혹은 세상을 뒤엎는 폭풍처럼 지나갔다. 아버지의 성품은 세월 따라 흘러온 강물처럼 유연해지고 마을 회관 경로당 출입도 잦아졌다. 사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아버지가 품을 수 없었던 세월을 이제는 이해할 것 같다. 나 또한 그랬었다. 세상사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내 가슴만 시린 줄 알았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일에도 인색했던 내가 세상을 둥글게 품는 일이 어디 쉬웠을까. 지금에 와 생각하니 옹졸했던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
팔순을 코앞에 둔 아버지가 빈 등으로 세상 한 채를 업을 수 있음은 여유가 아닐까. 등허리의 빈손 위에 가볍게 올라앉은 우주를 볼 수 있음은 나의 가슴이 둥글어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모든 것을 내려놓은 아버지를 닮기에는 부족함이 많지만 가끔 뒷짐을 져 보는 일도 괜찮을 듯싶다. 등 뒤에 두 손을 올려 삶을 뒤돌아보기도 하고 설익은 생각과 행동들을 둥글게 만들면 세상을 안는 마음이 더 너그러워지리라. 나도 아버지의 연륜이 되면 세상을 다 안을 수 있을까.
선산이 있는 재가 가까워진다. 아버지의 등에 있는 세상을 내 등 위에 올려본다. 둥근 세상을 업은 내 마음이 둥글둥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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