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이방인과의 동거 / 윤상홍

이방인과의 동거 / 윤상홍  

 

 

조물주의 불공평에도 좌절하지 않고 패자 부활할 수 있는 세상이다. 자연 미인이란 단어가 생겨난 것도 인위적으로 만든 인조 미인이 늘어나면서부터다. 경제가 받쳐주고 마음만 먹으면 미인의 반열에 오르는데 불가능은 없을 듯하다. 졸업을 앞둔 겨울 방학 기간에는 남녀 구분 없이 젊은이들로 성형외과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얼굴은 취업과 결혼에 이르는 무시 못 할 부분이기에 누가 그들의 선택을 가벼이 여길 것인가.

 

나의 둔한 눈썰미 탓도 있겠지만 TV에 등장하는 예쁘다는 여자들은 그 얼굴이 그 얼굴로 누가 누군지 헷갈리게 한다. 예전 기억으로는 선뜻 감이 잡히지 않아 아내에게 묻기 일쑤다. 복제 미인의 범람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우리나라 여성들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국운이 융성할 징조라고 누가 말한 적이 있다. 온 나라가 환해지는 느낌이 들고 생동감이 이는 것 같아 공감이 가는 말이다.

 

우스개 소리는 시대를 반영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유머로 한국 사람이 워낙 성형을 많이 하는지라 저승 들어갈 때 신분 구분이 어려워 ‘얼굴 자동 인식 시스템’을 설치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아 전통 예절 교육 사업을 벌이는 클럽에 몸담고 있다. 한해를 결산하는 평가회가 열리는 날, 조별 장기 자랑이 치열하였다. 나는 우리 조의 경연 기획과 연출을 자청하였다. 찜질방과 성형수술이 성행하는 우리 사회의 세태를 풍자한 내용에다 ‘장수 아리랑’을 덧대어 각색했다. 장수 아리랑은 아리랑 가락에 맞추어 개사를 했다. 이를테면 "60에 저승사자가 날 데리러 오거든, 성형수술 방금 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와 같이. 경연에서 최우수 입상을 하고 다른 무대에 찬조 출연까지 나서기도 하였다.

 

나는 외모에 자신이 없다. 별다른 매력이 없는지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 것은 물론 친근하게 접근하는 이도 드물다. 그래서 ‘얼굴보고 이름 짓는다’는 말에 심한 거부감을 갖는다. 얼굴처럼 못난 사람이라는 평판이 두려워 ‘뚝배기 보다 장맛’을 지향했는지 모른다. 거울 속을 한참 들여다봐도 내세울 데를 찾지 못한다. 그러나 유일한 팬은 아내다. 선을 볼 당시 나는 깡말라 있었건만 P대통령을 닮은 인상이었다니 시쳇말로 ‘뿅 갔다’거나 ‘필(Feel)’이 꽂혀 인연이 닿은 것 같다. 그녀의 착시가 아니었다면 내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감사한 일이다.

 

누구에게나 한 때는 있는 법이다. 생의 정점이던 모습을 간직할 겸 훗날 검은색 리본을 둘러쓰게 될 사진을 미리 준비하고자 아내의 제안으로 동네 사진관엘 갔다. 정장 차림에 훈장까지 달고 의자에 앉은 독사진을 찍는데 사진사는 이리 저리 열심히 찍어댔으나 의도한 그림이 잘 안 나오는지 고심이 묻어나는 기색이다. 렌즈는 거짓도 눈치도 없이 사진사를 괴롭혔다.

 

후에 사진을 찾으러 갔다. 궁금했던 사진 속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 있었다. ‘원판 불변의 법칙’은 옛말이 되어버려 사진사의 배려가 지나친 것 같았다. 후덕한 인물로 재탄생시켜줬지만 실물과는 한참 멀어져 있어서 ‘나‘라고 하기엔 무척 낯설었다. 수정이 지나치게 작위적이지 않느냐고 했더니 입 꼬리가 처져 있고 볼이 패여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게 ‘전문가’의 견해다. 보정한 여러 그림파일 중에서 썩 내키는 게 없어서 망설였다. 다시 찍자고 하기도 미안해서 차선으로 낙점해 버린 게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마뜩찮은 상품에 만만찮은 대금을 치르자니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미화 해 준 사진이 꼭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날부터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닌 이방인과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시간이 갈수록 내 시각은 누구려졌다. 내가 의기소침할 때면 “내가 있잖아?”하고 사각 틀 안에서 말을 걸어온다.

 

책상 서랍 속에는 증명사진이 여러 종류가 들어 있다. 졸업앨범 사진을 찍을 때 전문가들이 찍어준 것과 디지털 카메라로 내가 찍은 사진이 섞여 있다. 어느 단체의 가입 원서에 붙일 사진을 고르던 날이다. 보정 사진에 식상하여 디카로 찍은 ‘생얼’을 쓸까 하여 유심히 살펴보았다. 반백에다 세월의 흔적이 안면을 점령한 이 사진은 밀짚모자를 벗어 든 촌로의 모습, 내 모습 그대로였다. 마음과는 달리 선뜻 선택할 수 없는 할아버지 얼굴이었다. 진실이 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다시 붓질한 사진을 들고 망설인다. 분홍색 넥타이에 짙은 감색 양복 차림, 탄력과 혈색, 피부색이 젊어 보이고 깔끔하다. 이 사진이 채택되었다. 콤플렉스를 단숨에 날려버리고 빈 가슴에 훈훈한 위안을 채워준다. 잘나 보이려는 인간의 속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용기가 나에겐 없는 모양이다.

 

가끔 아내가 본 준수한 남정네를 입에 올릴 때면 으레 내 열등의식만큼 못마땅해 한다. 하지만 아내의 코디를 받고 외출하는 날, “당신, 멋있어요."하고 던진 한 마디에 금방 춤추는 고래가 된다. 짐짓했던 아내의 칭찬이나 사진 성형이나 과장되기는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내가 저승 갈 때 민얼굴로 가기에 망정이지 성형된 사진으로 본인여부를 가린다면 저승사자가 문책 받거나 얼굴 자동인식 시스템의 검증을 받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고단한 삶에서 위안이 될 수만 있다면 원판만을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사진이나 실물이나 삶의 기운을 돋우어 주는 성형, 나는 지금 예찬론자로 변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