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들지 않는 산 / 설성제
어둡사리가 사방에 스며들기 시작하는데 난데없이 헬리콥터 소리가 요란하다. 무슨 일일까? 얼른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소방비행기가 밧줄 끝에 커다란 물포대를 매단 채 급히 아파트 뒤편으로 사라진다.
뒷베란다로 달려간다. 뒷산은 검푸름에 싸여있다. 어슴푸레한 뒷산 어딘가에 헬리콥터는 보이지 않고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만 요란하다. 그러더니 다시 아파트 쪽으로 재빠르게 다가온다. 나는 또다시 앞베란다에 선다. 헬리콥터는 앞산 밑을 흐르는 강 위에 엎드려 물을 긷는다. 저 뒷산 어디쯤에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
십여 년이 넘도록 보아 온 산이지만 한 번도 물들지 않는 우리 동네 뒷산이다. 소나무가 주를 이루어 사계절 내내 푸른빛이다. 뒷산은 이제 나에게 오래된 권태다. 어떤 일도 일어날 리 없는 산이다. 고리타분한 뒷산이 변을 당한 것을 생각하며 잠을 청한다. 꿋꿋해 보이는 소나무들은 아마 무슨 일을 당하고도 아우성 칠 줄 모르는 바보처럼 서 있으리라. 설핏 드는 걱정은 간 곳 없고 왠지 지겨운 소나무들이 고소해지기까지 하다.
아침 산책을 다녀온 남편이 전날 초저녁에 불길이 잡혔다며 다행스러워한다.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하마터면 소나무를 다 태울 뻔했다고 혀를 쯧쯧 차며 출근길에 나선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나는 괜히 죄인 마냥 움츠려든다. 엊저녁 뒷산에 난 산불은 내 마음에 사리고 있던 불씨 하나가 튕겨져 나가 일어난 일은 아닐까. 언젠가부터 푸르기만 한 뒷산이 알록달록 물든 산이 되길 얼마나 많이 바라왔던가.
서둘러 뒷산에 오른다. 소나무 숲이 젖어 있다. 화마(火魔)가 나무마다 검은 띠를 둘러놓은 채 지나갔다. 아직도 축축하게 젖은 나무는 벙어리처럼 식은땀만 내뿜는다. 불길이 발을 삼키고 무릎을 핥고 허벅지를 휘감아도 입을 꾹 다문 채 서 있었을 것이다. 바로 눈앞에 선 소나무의 바보 같은 성정이 측은해져 온다. 누군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내버려뒀다면 밤새 소리 없이 사라졌을 나무, 한결같은 소나무다. 차라리 다 타버려 계절따라 색을 바꾸며 아우성치는 은행나무나 단풍나무, 산벚나무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면 오히려 내 마음은 후련했을까.
남편은 오로지 푸른 빛만 고집하는 소나무다. 좋은 일이나 궂은 일에 요동이 없어 보이는 그가 좋아 결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에 건조한 대화와 변하지 않는 말투, 낡아가는 겉모습과 퇴적암처럼 굳어가는 습관을 대하는 동안 권태가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럴 때마다 내 안에는 화마가 일어나 그를 밀어내고 싶었다. 때문에 남편은 내 등 뒤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돌아서 있는 나를 어쩌지 못해 한때 홀로인 시간을 가진 남편을 나는 가끔 바라보는 뒷산처럼 곁눈질해 보곤 했다.
시린 삶에 뿌리를 뻗어가기란 여간 힘들지 않음에도 남편은 꿋꿋함을 지키려는 듯 세상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뚜벅뚜벅 세월을 걸어 나갔다. 견디지 못하여 내 안에 숨겨 두었던 불씨를 던져도 제 몸이 타들어가는 줄 모르는 양 묵묵했다. 평생 물들지 않는 산이 싫었다. 꽃 피고 단풍 들며 잎 지는 산이 좋다는 내 말에 남편은 뒷산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앞산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바위를 굴리는 것 같은 힘든 삶과 답답한 가슴을 하소연하면 앞산은 나의 구색과 비위를 맞춰냈다. 내 마음을 잘 알아차리는 듯 온갖 말로 나를 위로해준다. 봄이 되면 꼬물꼬물 돋는 연둣빛 움이 겨우내 흐렸던 시야를 맑게 한다. 나른한 산벚나무 사이로 뻐꾹새가 울고 나면 이내 녹음이 우거지다가 또 단풍으로 화려하게 치장한다. 눈이라도 내리는 겨울이면 빈 가슴을 새하얗게 드러내놓는 겸허함마저 보여주며 나를 다독인다.
그러나 달려가 안기고 싶은 앞산은 언제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다. 앞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우선 강을 건너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집에서 앞산 초입까지 걸어가기에는 멀어 차를 타야하는 번거로움이 만만치 않다. 아무 때라도 쉽게 산책을 할 수 없고, 약수를 뜰 수도 풀잎을 만질 수도 없는 산이다. 그저 깃들어보고 싶은 그림 같은 산이다. 뒷산이 권태로울 때 속이 후련해지는 이상의 산 하나가 앞에 우뚝 서 있을 뿐이다.
아무런 채비 없이 가볍게 뒷산에 올라 물들지 않는 나무 앞에 선다. 불평했던 내 말을 혹시 들었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검게 덴 자국을 만져본다. 언제쯤이면 새 살이 차오를까, 쓰라림이 전해온다. 화마의 순간을 잊는 데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할지 생각해본다. 소나무는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듯 가을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있다.
남편의 지천명 세월을 돌아보면 실수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쓰러질 듯 위태위태한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쉽사리 세상에 편승하지 않은 곧은 성격 탓이리라. 심지어 원망을 일삼는 나에게 차라리 침묵으로 대언한 모습은 영락없는 뒷산을 닮았다. 이제 머리카락은 반백이 되어가고 주름이 여기저기 파고들기 시작하지만 언제나 내 뒤에 서서 푸름을 지키는 물들지 않는 산이다.
발아래 저만치에서 억새가 하얗게 인사를 건네 온다. 자줏빛 싸리꽃도 가을 볕과 손 잡고 있다. 성질 급한 옻나무 잎이 빨갛게 물든 사잇길로 마른풀 냄새가 난다. 사람들의 잦은 발걸음으로 인해 반들반들해진 길가에는 개미들이 행렬을 이루어 집으로 돌아간다. 풀과 풀 사이에 지어놓은 거미집도 굳건하다. 저마다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중이다. 나는 왜 뒷산에서만은 이런 변화를 눈여겨보지 못했을까.
뒷산은 물들지 않는 산이 아니었다.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나니 뒷산은 속가슴에서부터 물드는 산이었다. 고집쟁이처럼 보였던 소나무를 물들지 않는 산이라 여겼던 것은 속까지 들여다보는 내 마음의 눈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실수와 비아냥거림과 교만함을 눈 감아 주는 소나무 아래에서 나는 마음껏 울고 웃는 키 작은 풀잎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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