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새 / 김희자
고요에 묻힌 섬을 가로등이 밝히고 섰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해소기침 소리가 밤의 적막을 깬다. 몰려오는 피로를 발길질하며 병실을 한 바퀴 돈다. 어젯밤 치매증세로 소란을 피웠던 복순 할머니와 종식 할아버지가 곯아떨어졌다. 안도의 숨을 돌리며 209호로 들어서니 잠들었으리라 여겼던 점생 할머니가 침대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희미한 취침 등 불빛을 등지고 앉은 할머니가 해님처럼 벙글거리며 속삭인다. "왜 안 자고 다니노?" 할머니의 미소에 녹아든 나는 마냥 어리광을 피우고 싶어진다. 어린아이마냥 아양을 떨며 침대 옆으로 다가서니 내 손을 잡아당긴다. 잠잘 때가 없더냐며 당신의 침대 한편을 내어준다. 팔베개도 해줄 태세로 모로 누워 손을 뻗는다. 할머니의 순수한 인정에 쌓였던 피로가 봄눈 녹듯 사라진다. 어느 누가 이 순수한 할머니에게 치매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점생 할머니는 치매증세가 슬슬 고개를 들면 오늘밤처럼 밤잠을 설친다. 천성이 부드러우니 증상마저 순해 옆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할머니가 주무셔야 나도 쉴 수 있다며 등을 감싸며 어른다. 두 눈을 살포시 감은 모습이 천생 어린아이 같다. 등을 토닥거리는 내 마음이 통한 것일까. 이내 잠이 드신다. 요 근래 할머니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는 것 같다. 밤에는 고분고분하지만 증세가 심해지는 낮이면 그 순하던 모습도 온데 간 데 없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는 핏대가 불뚝 서고 흥분된 목소리는 고조된다.
며칠 전, 그날도 치매는 침잠하던 할머니의 기억을 충동질했다. 고요하던 병실 복도에서 간병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달려가니 보따리를 든 할머니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가는 길이 어디냐고 묻는 할머니께 시치미를 뚝 떼며 여쭈었다.
"할머니, 보따리까지 싸서 어딜 가시려고요?"
"큰집에 갈라꼬!"
구십 도로 굽은 등을 젖히며 대답했다. 어렵사리 세운 등은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할머니가 잰걸음을 치자 굽을 대로 굽은 상체가 바닥에 닿을 듯 흔들렸다. 큰집에는 왜 가시냐고 물으니 애기가 없어졌다며 안절부절 못했다. 물을 묻혀 고이 넘긴 머리칼이 가지런히 누워있고 양 옆머리에는 똑딱 핀이 앙증맞게 꽂혀 있었다. 핀을 야무지게 꽂은 모습이 귀여워 웃음보가 터졌다.
병실에 들어서면 눈웃음만 치던 할머니였다. 서둘러 아기를 찾아야 한다며 걷는 할머니의 꽁무니에 수간호사와 내가 뒷짐을 지고 따랐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간병사가 키득키득 웃었다. 큰집으로 가는 길을 찾던 할머니는 젖 먹일 시간이 지났는데 아기가 안 온다며 발을 동동 굴렸다. 기다림에 목이 타는지 찬물을 쉬지 않고 들이켰다. 집에 가서 기다려보자며 달래니 순순히 따랐다. 병실로 드는 할머니의 걸음이 빨라지니 손에 든 보따리도 바삐 왔다 갔다 했다.
점생 할머니께 가끔 나타나는 치매증상이다. 구십이 넘은 할머니의 생각이 젖 먹이던 시절에 정지되어 있는 것이다. 버리고 싶은, 돌아보고 싶지 않은 쓰라린 기억들이 모여 인생이라는 그림을 만든다. 할머니는 그림 속의 기억 한 조각을 버리지 못해 보따리를 수십 번도 풀었다 싼다. 당신이 생활하던 터전을 잃고 보금자리가 되어버린 요양병원이다. 있는 듯 없는 듯이 지내다가도 잃어버린 둥지를 찾아 헤맨다. 어미 새가 새끼 새의 배고픔을 안쓰러워하듯 당신의 마른 젖이라도 먹여야 한다며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는다.
침대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할머니가 병실에 들어서자 당신의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침대를 가리키며 마루에 올라서라고 부축했다. 침대에 오른 할머니가 또 아기 걱정을 했다. 마루인 줄 알고 침대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애처로워 흘러내리는 귀밑머리를 가만히 쓸어 귀 뒤로 넘겼다. 어쩌면 할머니는 큰집에 아들을 양자로 보내지 않았을까?
오래전 소중한 사람을 보내고 한참 동안 돌아서지 못했던 기억,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 갇혀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지도 모른다. 자식을 찾아 헤매는 치매증상은 추해보이지 않았다. 진한 모성애에 오히려 동정이 갔다. 곱게 빗어 넘긴 머리가 할머니의 성품을 말해주었다. 귀여운 머리핀들은 어디에서 났을까? 할머니의 보자기를 풀면 소지품이 쏟아져 나왔다. 얌전하게 접은 속옷과 손바닥 크기의 손거울, 노란 빗과 예쁜 핀들. 그리고 할머니가 신던 하얀 고무신이 소지품의 전부다.
꿈나라에 든 할머니의 모습을 내려다본다. 진주 팔찌가 유난히 반짝거린다. 고명딸이 낀 팔지에 관심을 두자 만들어준 것이라 했다. 진주로 꿴 팔찌에는 빨간 장미 한 송이가 피어있다. 오늘밤 팔목에 핀 장미는 할머니의 정처럼 유난히 붉다. 누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픔은 있기 마련이다. 그 아픔을 가슴에 담아두면 또다시 되살아나는 것이 치매증상이 아닐까? 마음은 슬픈 가락에 떨며 한없이 울고 있건만 세월은 무심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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