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剪枝) / 지연희
정원사가 하는 일은 나무의 가지를 치는 일이다. 나무의 모양을 아름답게 하기 위함이고, 분수없이 웃자람을 막는 일이며, 좋은 결실을 위해 곁가지를 자르기도 한다. 나무는 정원사의 가위 끝으로 새로운 모습을 찾는 반면, 가지가 잘리는 고통을 함께 한다. 학생의 옳지 못한 일을 체벌하는 스승처럼 가위에 힘을 주어 나무를 자른다. 전지가 된 나무의 모양은 한결 아름답다. 정원사의 의지에 따라 둥글게 혹은 길게 다듬어진 나무는, 이제 막 이용(理容)을 마친 사람처럼 깔끔한 모습이 되기도 한다. 조각가의 손끝으로 빚어낸 비너스를 감상하듯, 정원사는 새로운 모습 찾기의 희열을 맛보게 된다. 무엇인가를 잘라내고 다듬어 낸다는 의미는, 새로운 모습 속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창조의 작업이기도 하다.
작은 것이 단단하듯, 키를 키우지 않는 나무가 역시 단단하다. 그러나 성장의 욕심을 일순간에 끊어 내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나무는 가지 끝마다 성장의 욕심을 보인다. 이쪽으로 기웃거리며 저쪽으로 고개를 들어 보인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바람도 쏘이려 함이다. 때로는 푸른 하늘에 해가 기울고 먹구름과 비바람이 몰아쳐도 내민 고개를 좀처럼 접으려 않는다. 꿋꿋이 일어서며 불쑥 불쑥 고개를 치켜세우고 별과 달빛을 맞을 꿈을 꾸는 것이다.
어떤 아름다움이든 아름다움의 완성 뒤에는 고통의 흔적이 있다. 전지(剪枝)하고 난 뒤의 나무 둘레에는 가지 끝에서 잘려져 나간 많은 생명의 아픔과 만나게 된다. 아름다움은 가장 높은 희생으로 빚는 예술작품일까. 정원사는 잘려져 생명을 잃는 고통은 모르는 채, 자름으로 얻는 기쁨을 앞세운다. 굵은 가지이든 가는 가지이든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내느라 땀을 흘린다. 포도나무 가지에 매어 달린 아기 포도 알이 정원사의 가위에 의해서 땅에 떨어지고, 손가락 마디 크기로 자란 아기감도 성장의 기회를 빼앗기게 된다.
분수없는 욕망을 키운다는 자성(自省)에 빠질 때는, 정원사의 가위를 떠올린다. 그의 가위를 가져다 가끔씩 내 나이를 잊게 하는 허황된 욕심과, 나의 환경에 익숙하여 틀을 깨지 못하는 고정관념이며, 냉철한 사고를 거치지 않고 무작정 키를 세우는 이상(理想)이며, 옳고 그른 사고를 주지시키는 내 존재의 배경에 대고 힘을 주어 잘라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로운 모습 찾기에 보내는 갈망일까. 정원사의 가위가 닿기 전 멋대로 자란 나무의 모습에서, 정원사의 가위질 이후 상큼한 모습의 나무에 보내는 애정이다.
나무는 정원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며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전신으로 느낀다. 손톱 끝을 잘리어 전신에 감기는 고통만큼 가지가 잘리는 아픔을 함께 나눈다. 손가락 마디마디를 도려내는 고통과 아픔은 오래 지키던 소중한 인연 끊기와 다르지 않다. 필요 없는 인연은 없다. 필요 없이 키를 키우는 생명은 없다. 필요 없는 사물은 필요 없는 사물에 대한 희생물일 뿐이다. 생명의 힘으로 뻗어난 나뭇가지를 굳이 잘라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자연보호 운동에 반하여 자연은 잘리고 허물어져 물질문명의 발달을 이루기에 한 몫 하기도 한다. 문득 "나무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라는 가르침을 떠올리게 된다.
사람의 가슴에 키우는 나무는, 덜 생긴 모양을 다듬어 주거나 분수없이 웃자란 욕심을 잘라내며, 내일의 튼실한 결실을 위해 가지를 쳐 주는 정원사가 없다. 가만히 서 있어도 달려와 가위를 드는 정원사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나무는 제 안에 굳건한 의지를 일으켜 가위질을 할 정원사를 고용하지 못한다. 사람의 가슴 속에 들어와 선뜻 가지를 다듬어 줄 정원사는 없다. 사람의 나무는 오직 제 스스로 제 몸을 자르는 아픔과, 잘리어 나는 아픔을 동시에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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