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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풍경소리 / 김옥기

풍경소리 / 김옥기

 

 

 

땡그랑, 땡그랑, 대앵. 풍경이 운다. 산속의 절도 아닌, 나의 조그만 집에서 풍경이 운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내는 풍경소리는 산사에서 내는 풍경소리처럼 길지는 않지만 그윽한 여운을 남긴다.

땡그랑, 땡그랑, 대앵.

풍경소리에 한국의 깊은 산속, 맑은 하늘이 묻어나온다. 나무들의 대화, 물 흐르는 소리, 바람, 바람소리. 그런 그리움의 소리가 집안을 잔잔하게 울린다.

한국에 갈 때마다 한국을 미국으로 가져오고 싶어진다. 어쩌다가 와서 살게 된 땅은 미국이지만, 땅만 미국이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마음에 담아둘 수 있는 것들, 한국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 이곳이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지, 하며 생각할 수 있는 것들에 욕심을 갖는다.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한글로 된 책들, 틀면 언제든지 들을 수 있는 한국노래의 테이프나 CD, 한국 차, 도자기로 만든 찻잔, 사발그러다가 인사동 거리에서 풍경을 만났다.

그것은 내가 직지사나 수덕사, 마곡사 등 사찰 처마 밑에 달려있는 풍경의 모습을 닮았고, 그 소리의 아름다움을 닮아있었다.

이 풍경은 종 아래에 물고기를 달아 맨 한국의 사찰에서 본 무게 있는 큰 풍경이 아니다. 작은 종 밑에 아주 작은 종 세 개가 달려있고, 그 아래에 둥근 추를 달아서 흔들면 각기 다른 소리를 내면서 그 소리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화음을 낸다. 흔들면 내는 청아하고 아름다이 내는 소리가 좋아 그 풍경 몇 개를 사와 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한 개를 남긴 것이다.

집 문 밖에 풍경 달 곳을 찾아봤다. 그러나 어디에도 작은 풍경하나 달 곳이 없었다. 한국서처럼 처마 밑에 달고 바람이 불 때 내는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자 했던 작은 꿈은 사라져버렸다. 나의 집은 처마도 없고, 집에 들어가는 문 바깥에 작은 못 하나 칠 곳이 없다.

풍경 달 곳을 못 찾고는, 이 다음에 집 뒤 잔디밭에 정자를 만들면 거기에 달아야지, 하고는 집안으로 끌고 들어온 게 바로 리빙룸과 부엌을 오가는 머리 위 오른쪽이다. 그곳에 못을 박을 수 있는 나무 벽이 있어서 풍경의 자리를 잡아줬다. 그 아래를 지날 때에만 머리에 닿아서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참 좋다.

원래 풍경은 처마 밑에 달아서 바람이 불 때 흔들리며 몸체와 추가 부딪혀서 소리를 낸다. 그래서 풍경소리는 바람이 지나는 흔적이고, 풍경에 달린 물고기는 푸른 하늘에서 헤엄을 친다고 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이 미국 땅에서 한국 산사의 풍경소리를 듣고 싶어 했던 것이다.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영원의 소리를 내는 풍경소리를 집에서 듣고 싶었다. 물고기가 하늘을 마음껏 유영하는 것을 보는 자유를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가져온 풍경은 바깥바람 한 번 쐬지 못하고, 바람 한 점 없는 집 안에 갇혀서 우리 가족의 머리에 받혀서만이 소리를 내며 산다. 그런 풍경에게 내가 이민을 잘못 시켰다고 말했다. 조금 미안한 마음과 함께 저도 나도 안쓰러움이 반반이라 생각한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풍경에게 말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정자를 지으면 그때 마음껏 울어라, 하고.

풍경소리를 왜 풍경이 운다고 하는가. 풍경은 우는데 그 소리는 어찌 아름다운가. 풍경은 집안에 갇혀있으면서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면서 나를 즐겁게 한다. 어두웠던 나의 심령이 풍경소리에 맑아지고, 잠들었거나 죽어있는 집안 곳곳의 집기들이 풍경이 내는 정신의 소리로 깨어난다.

이철수는 풍경소리밤새 바람 거칠어 풍경이 몸살을 한다. 존재가 모두 이렇게 몸 있는 동안 바람을 타기 마련이라고 했다.

나의 집 풍경은 바람도 없이 마음으로 자연과 만나 소리를 전한다. 집안에서 내는 소리가 산사에서처럼 그윽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일까.

집에 있는 날이면 집안을 오가며 머리에 받혀서 내는 풍경소리를 자주 듣는다. 소리가 멈추면 손으로 추를 건드리거나 풍경 전부를 흔들어서 소리를 내게 한다.

풍경소리를 들으면서 바깥을 내다본다. 유리창문 밖엔 하늘이 있고, 숲이 있고, 늪이 있다. 때로는 넓은 잔디밭에 뛰노는 사슴도 볼 수 있다. 너무 작지만, 연못 속에서 거북이 두 마리가 놀고도 있다. 집안에서 우는 풍경은 바깥의 그것들과도 만나 댕그랑 댕그랑하면서 이야기 한다. 풍경소리는 잎이 다 져버린 쓸쓸한 나무들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어쩌면 한국의 산사를 닮아있기도 하다.

땡그랑, 땡그랑, 대앵. 여운을 남기며 우는 풍경소리 속에 그리움이 배어나온다. 풍경소리는 왜 매번 그리움을 일게 하는지 모른다. 풍경은 그립다, 그립다하면서 우는 것 같다. 그래서 풍경소리는 그리움의 소리인가. 그래서 집안에서 우는 풍경소리도 애잔한가.

떠나온 고향, 떠나간 세월다 그립다. 왜 풍경이 운다고 하는지도 알 것 같다.

풍경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그리움을 일게 한다. 사라지는 가을 속에 풍경소리가 묻힌다. 앙상한 나무들의 숲속으로, 누렇게 익은 갈대밭으로 가늘고 그윽한 여운을 남기면서. 그 여운과 함께 그리움만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