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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2

[좋은수필]달려라 장여사 / 박소현

달려라 장여사 / 박소현

 

 

 

책상 서랍 속 작은 상자 안에 숨어 수줍게 얼굴 내미는 하얀색 봉투 하나. 빛 볼 날을 기다리는 빳빳한 오만 원권 20장과 함께 서투른 글씨로 봉투 위에 꾹꾹 눌러 쓴 어머니의 짧은 편지. ‘작지만 학비에 보태 써라. 장하다 우리 딸, 내가 다 조야되는데.’

울컥, 눈시울 붉어지게 하는 어머니의 심장 같은 그 돈을 차마 나는 쓰지 못한다. 마치 은밀하게 숨겨둔 비밀처럼 가끔씩 들여다만 볼 뿐.

어느 순간 삶이 너무 무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톱니바퀴처럼 꽉 물려 숨 쉴 틈 없이 부산스러워 보이는 내 생활 이면에 웅크려있던 허기 같은 것들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가끔씩, 또는 자주, 가슴을 짓누르며 슬며시 고개를 드는 공허감 같은 것들이 치밀어 올 때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다. 딱히 어떤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특별하지도 뛰어나지도 않고 무탈하게 살아온 나 자신에 대한 선물 같은 것이랄까. 아니 어쩌면 그건 몇십 년 전부터 내 무의식 속에 잠재된 욕망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86세로 지팡이가 아니면 온전히 운신도 못하는 어머니는 50이 넘어 대학원에 간다는 딸의 학비가 내심 걱정이었나 보다. 지난겨울, 우리 자매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해운대 콘도에서 며칠 머물게 됐을 때 누가 볼 새라 쏜살같이 내 핸드백 속에 봉투 하나를 넣어주었다. 한사코 마다하는 나에게 마치 당신이 더 많은 것을 못해줘서 안타깝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어머니는 나에게 줄 그 돈을 찾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은행까지 걸어갔을까. 조심조심 지팡이에 의지한 채 들숨날숨 가쁜 숨을 고르며 길가에 주저앉아 몇 번을 쉬기도 했을 것이다. 창구 앞에 가서는 낯익은 여직원에게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을 테지.

우리 딸 등록금 줄라고, 새 돈으로 주이소.”

바닥이 가까워져 갈 당신의 통장 잔고에서 분신 같은 그 돈을 나이든 딸의 등록금으로 찾을 때 어머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 나이 43세였다. 살림만 하던 어머니는 슬픔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생선 행상을 나서야했다. 아버지 병원비로 거덜난 가정 경제와 12살과 9살인 나와 여동생을 중학교라도 온전히 보내야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으리라. 새벽부터 생선이 가득 든 고무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버스와 나룻배를 타려고 무던히도 종종걸음 쳤던 그 인고의 세월을 견디면서도 딸들이 기 죽을 세라 남들보다 예쁜 옷을 입히고 거친 보리밥은 잘 먹이지 않았다.

어디 그 뿐이랴.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는 돈도 없는 집에서 딸들한테 무슨 대학교육이냐며 남들이 손가락질을 할 때도 억척스럽게 등록금을 마련하고 동생이 대학에 갈 때는 시골에서 부산으로 아예 이사까지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당신의 사명인 것처럼.

시험기간에는 각성제인 타이밍을 사 와서는 그것이 최선인양 밤새워 공부하길 바랐다. 각성제가 몸에 좋고 안 좋고 따지기엔 절실했던 그 무엇이 있었고 또한 무지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약을 먹고도 꾸벅꾸벅 졸다가 타이밍(timing)을 맞춘 것처럼 방바닥에 엎어져 잠들기 일쑤였으니.

어쩌다 용돈이라도 조금 드릴라 치면 너거 아버지 돌아갔을 때 나하고 진경이 엄마 까막눈 맨들까봐 내가 제일 걱정했다 아이가. 그런데 내가 이 나이에 딸 득으로 살 줄 어찌 알았겠노. 요즘은 사람들이 진경이 엄마 교수 하는 거 보고 딸들 잘 키웠다고 다들 부러워한다.” 하면서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사람은 평생 배워야 한다며 70의 나이에 이이들이 하는 학습지로 한글과 한자를 배우던 어머니는 내가 대학원 공부를 한다는 말에 어찌나 좋아하던지.

직장생활을 하는 막내딸을 대신해 손녀와 손자를 보살피느라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는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호구지책에 대한 강박관념은 변할 줄은 모른다. 입안에 먹을 것이 든든하게 없으면 불안하다며 쌀과 잡곡들을 한 가마니씩 사 두기도 하고 생필품을 필요 이상으로 사재기를 하면서 한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몸을 움직인다. 조금이라도 한가하면 마치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것처럼.

기나긴 세월 동안 슬픔의 분신들마저 자식들에게 다 소진해 버린 쇠락한 어머니가 침침한 눈으로 재봉틀을 돌린다. 집안의 조카들이나 하는 아이들이 인사삼아 용돈이라도 주고 갈라치면 손수 만든 과자마다 실내용 원피스 같은 걸로 답례를 하기 위해서다. 어머니의 부지런한 손끝에서 만들어진 소품들은 살아있음의 증거이며 생을 지탱하는 이유이자 희망일지도 모른다.

남한테 공 걸 바라면 안 되는 거라.”

내가 조금 손해 본 듯 살면 탈 없다.”

어릴 적, 귀에 못이 박히도록 무던히도 많이 들었던 말이다. 젊은 시절 그 힘든 풍랑을 의연하게 견뎌온 어머니는 아무리 힘들어도 남에게 의지해선 안 된다는 걸 몸으로 보여 주었다. 자식들에게조차 행여 부담이 될까봐 스스로 수의를 장만하고 장례보험까지 다 들어놓았으니 말이다.

엄마도 여지인 것을. 그 젊고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되어버린 엄마에게도 행복했던 봄날이 있었을까? 자기 몸속에서 자라던 새끼들이게 몸을 다 파 먹히고 빈껍데기가 되어 흐르는 물에 조용히 떠밀려가는 다슬기처럼 모든 것 다 태워버리고 이제는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져 삭정이 같은 몸이 되어버린 내 어머니 장채란 여사. 오늘따라 거친 풍랑의 세월을 지나온 어머니의 삶의 궤적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채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다. 지팡이를 집어던지고 옛날처럼 힘찬 달음질로 달려서, 달려서 우리 집으로 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머니의 심장 같은 하얀색 봉투를 가만히 만져본다. 따뜻한 체온이 꿈길처럼 손끝으로 전해오는 듯하다. 나는 어쩜, 아주 오랫동안 이 봉투 속의 돈을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눈물 같은 이 소중한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