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 아래에서 / 원용수
이팝나무에 꽃이 피면 옛날 생각이 나서 그냥 집 안에 앉아 있을 수 없다. 내가 어릴 때, 그렇게 먹고 싶던 이밥이 나뭇가지에 달렸으니 눈요기라도 할 요량으로 앞산 순환 도로로 달려갔다. 흰 꽃은 밥그릇에 사붓이 담긴 이밥을 보는 듯하였다.
내가 어릴 때, 할아버지 진지 상을 나르는 일은 내 차지였다. 할아버지께서는 끼니마다 밥을 한 숟가락 정도 남기셨다. 나는 밥상을 낼 때마다 그 밥을 게 눈 감추듯이 먹어 치웠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께서는 막내 손자에게 귀한 이밥 한 숟갈 먹이려고 남기신 것인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이밥에 눈이 팔려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드렸다.
그 시절 우리 집에서 완전히 흰 쌀밥만 드는 사람은 할아버지뿐이셨다. 우리는 대농이어서 쌀만 먹어도 계량이 되는데 쌀은 먹지 않고 시장에 내다 팔았다. 농촌에서 돈을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느라, 아버지 밥상에도 쌀과 잡곡이 반쯤 섞이고, 그 아래 식구들은 잡곡으로 끼니를 때웠다. 잡곡도 여름엔 감자와 보리밥, 겨울엔 깡그리 조밥만 먹었다.
잡곡밥이라도 밥을 먹는 집은 잘 사는 집이다. 쌀이 모자라서 아침저녁으로 죽을 먹는 집도 있었다. 죽도 사는 형편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었다. 살림이 괜찮은 집에서는 쌀을 넣은 죽을, 못 사는 집에서는 잡곡을 넣은 죽을 먹었다. 쌀이 부족하여 밥에 푸성귀, 송구, 등겨를 섞어 먹는 집이 많았다. 춘궁기에는 그것도 없어서 끼니를 굶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민족은 옛날에 부끄럽게도 먹고 사는 게 큰 문제였다. 지금은 민족과 국가를 걱정하는 지도자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여 다행이지만, 아직도 우리 이웃에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있다니, 거짓말 같은 사실이다.
요즘 사람들은 끼니마다 쌀밥을 먹으니까, 쌀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아이들은 밥을 잘 먹지 않아서 부모가 밥그릇을 턱밑에 받치며 먹인다. 학교 급식 시간에도 밥을 먹기 싫어, 입안에 든 밥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시간을 끄는 아이가 있다. 우리가 자랄 때 이밥 한번 실컷 먹어봤으면 원이 없겠다던 세월과는 격세지감이 난다.
지금은 학교에 갈 때 도시락을 안 가지고 다니지만, 몇 년 전까지는 도시락을 갖고 다녔다. 점심시간에 펴놓는 도시락에 가정 형편이 다 드러났다. 우선 밥을 보면 하얀 이밥만 담은 도시락, 잡곡을 반쯤 섞은 도시락, 잡곡만 싸 온 도시락 등 그 내용물이 다양하였다. 반찬도 장아찌, 마른 멸치 볶음, 계란 찜, 고추장 등 여러 가지였다. 도시락은 나무도시락과 깡통도시락을 많이 갖고 다녔는데, 나무도시락이 훨씬 고급스러웠다. 깡통으로 만든 도시락에 싸온 밥은 퍼렇게 녹이 쓸어 보기 흉하였다. 밥과 반찬이 좋은 사람은 도시락을 버젓이 펴놓고 먹는데, 잡곡밥을 싸 온 사람은 도시락을 뚜껑이나 손으로 가리면서 급하게 퍼 넣었다. 즐거운 식사 시간이어야 하는데 괴롭고 부끄러운 시간이었다. 지금은 학교 급식으로 점심시간만큼은 먹고사는 게 평준화 된 셈이다.
나는 이밥을 맛있게 먹은 추억이 있다. 군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데 나 보다 한 계급 위인 P상병이 항고에 기름기가 도는 따끈따끈한 쌀밥을 가지고 와서 같이 먹자고 하였다. 반찬은 식용유와 된장이었다. 그와 나는 다 같이 '00군번'이었고 평소에 뜻이 통하는 지기였다. 나는 그가 쌀밥을 어디서 어떻게 구해왔는지 몰랐다. 그는 나와 맛있는 걸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최전방 부대라 외출도 못하고 매점도 없어서 마음뿐이었다고 하였다. 한밤에 잠도 안 자고 찾아 온 그가 너무 고마워 두 손을 잡고 할 말을 잊었다. 나는 밥을 먹으면서 그의 따뜻한 정까지 먹었다. 늦은 밤, 촐촐할 때에 먹은 이밥 맛과 그의 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쌀밥에 대해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또 있다. 중국에 여행을 갔을 때, 연변의 조선족 집에 갔더니, 이밥을 고봉으로 담아 내 놓았다. 일행들은 하나같이 밥이 많다며 그릇 전 위의 밥은 들어내었다. 남의 나라에서 우리 조상들의 옛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 조상들은 밥그릇 위에 밥그릇만큼 담은 밥을 다 먹었다. 간식도 없고 식사 시간만 기다리다가 밥을 보니 그랬으리라. '밥 힘으로 산다'는 말은 그걸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은 의식주 생활 중에서도 식생활 해결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었다. 돈이 모이면 논을 사려고 장롱 깊숙이 보관하였고, 이웃에 누가 논을 내 놓으면 서로 살려고 뜸을 들였다. 나도 시골에 있을 때, 어른들의 권유로 논을 댓 마지기 사 두었다. 그 덕에 지금까지 양식 걱정 없이 지낸다. 우리뿐만 아니고 살림난 딸과 아들에게까지 쌀을 나누어준다.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논 값이 내려간다며 시골에 있는 논을 팔아오는데 나는 별로 신경도 안 쓰고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중형이 농토를 애지중지하며 농사를 짓는데 논을 팔 수 없었다. 또 시골은 나의 뿌리인데 내가 살던 흔적을 모두 없앨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형수님은 쌀 인심이 후하다. 희수를 바라보는 분이 지금도 농사를 지으면서 자녀들과 동기에게 쌀을 나누어 준다. 못자리 논하려고 우리 논 두어 마지기 부치는데, 우리 논을 부치는 다른 집보다 쌀을 많이 준다. 쌀 외에 찹쌀, 감자, 고구마, 무, 파까지 아끼지 않고 듬뿍 주신다. 우리는 쌀을 받고 그냥 올 수 없어서 쌀값을 드리고 온다. 논 붙이고 쌀 주는데 돈은 왜 주느냐고 마다하셔도 기어이 드린다. 형수님이 연세가 들어도 농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쌀 인심을 나누고 싶어서이다. 지난 가을에는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농사일도 못할 것 같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농사를 그만두어 쌀 인심을 못 내면 얼마나 한스러울까. 경운기를 끌며 남정네 못지않게 일하셨는데, 나이는 속일 수 없는가 보다.
이팝나무에서 싸락눈이 내리듯 꽃이 떨어진다. 나는 꽃을 주웠다. 꽃으로 이밥 한 그릇 만들어, 할아버지 산소에 찾아가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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