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만들던 날의 풍경 / 김녹희
누군가는 잔칫집에 시집가는 게 꿈이었다는 데, 시댁이야말로 조용히 자란 나에게 늘 잔칫집 같았다. 남편의 동기가 구남매인 데다 결혼해서 분가를 했어도 매일 모이다시피 했다. 때로는 번갈아 가며 머무르는 친척들까지 합해 스무 사람 정도가 식사를 하곤 했다.
황해도 사리원에서 월남하신 시부모님은 식구들에게 잘 해 먹이는 것이 가장 기쁘게 여기셨다. 그렇기에 시장사람들은 매일같이 장을 많이 보는 시어머님께 여관을 하느냐고 묻기까지 했었단다. 정말 여관인 것처럼 부엌은 거의 언제나 음식 준비로 바빴다. 묵을 쑤는가 하면, 녹두를 갈아 무쇠 솥뚜껑에 빈대떡을 부치고, 콩을 불려 두부를 만들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예쁜 모양내기 경쟁을 하며 만두를 빚었다. 그뿐이 아니라 그 복잡한 과정을 다 거치려면 온종일 걸리는 순대를 만드느라 분주하기도 하며, 마당의 진달래 꽃잎을 따가 화전을 지지고 시루에 떡을 찌기도 했다.
시댁은 특별음식을 꼭 집에서 손수 장만했다. 시부모님은 그것에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계셨다. 아버님 친구 분이 식구들을 데리고 불고기를 사드셨다며 친구가 음식솜씨 없는 부인 만난 것을 불쌍히 여겼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남편과 아주 다른 생활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식구가 단출해선지 부모님은 유난히 ‘기분’을 중요하게 여겨, 집에서 저녁준비를 다 해놓고도 기분전환하자며 외식을 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위기가 다른 시댁에서 나는 해외로 갓 입양되어 간 아이같이 앉을 자리를 찾지 못했었지만 조금씩 그 분위기에 젖어 들었다. 그런데 커피엔 적응이 힘들었다. 커피를 즐기시던 어머님은 식후에 언제나 식들에게 커피를 커다란 잔 하나 가득씩 타주셨다. 나는 그 큰 잔으로 하루에 세 번씩이나 마신 커피 때문에 매일 배가 아팠다. 내색을 못하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커피 반 잔을 주문했지만, 어머님이 “원, 언 참 별나기도 하다. 그까진 게 뭐가 많다고 반 잔을 마시냐.”하며 한 잔 가득 주시는 바람에 보약 먹듯 삼키고는 쓰린 속을 달래야만 했다. 커피뿐 아니라 무슨 음식이든 아주 맛있게 드시던 어머님은 유머도 넘쳐서 식사도중 느닷없이 이렇게 소리치곤 하셨다. “헷바닥 꼭 붙들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뭐를 붙잡으라고 하는 건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건 하고 맛있어서 혀까지 넘어갈까봐 정신 차리라는 이북식 농담이었다.
고향음식을 좋아하던 대식구의 식사준비로 부엌은 한가할 새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더 분주했던 날은 어머님의 진두지휘로 냉면을 만들 때였다. 그런 날은 솜씨 좋은 누님들이 이른 아침부터 불려왔다. 냉면육수로는 겨울엔 슴슴한 동치미 국물과 닭을 푹 곤 국물을 섞었고, 여름엔 동치미 대신 나박김치를 담가 놓았다.
부엌에서 메밀가루와 녹말가루를 섞어 손을 벌겋게 데어가며 끓는 불로 익반죽하기 시작하면 뒷마당의 가마솥엔 뜨거운 물이 설설 끓었고, 가마솥 위에 육중한 수동 국수틀이 놓였다. 잘 주무른 메밀반죽을 한주먹씩 떼어 국수를 위에 얹으면, 남자들이 팔뚝에 불끈 힘줄이 솟도록 근력을 다해 손잡이인 쇠막대를 눌렀다. 오래된 국수틀이어선지 손잡이는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앙다문 얼굴에선 굵은 땀방울이 사정없이 흘렀다. 그제야 제면기에서는 천천히 국수가닥이 뽑혀 나오며 뜨거운 김이 용암처럼 뿜어 오르는 가마솥으로 떨어졌다. 시원한 냉면 국수를 만들려면 사람들이 땀으로 흠뻑 젖을 수밖에 없다는 건 역설적이었다.
가마솥을 데우느라 장작불 지피는 이, 땀범벅이 되어 국수를 누르는 이, 가마솥에서 막 건져 뜨거운 물이 떨어지는 냉면국수를 식히려 수돗가로 뛰어가는 이, 차가워진 냉면사리를 그릇에 단아 준비된 육수를 붓는 이, 국수 위에 닭고기와 오이 겨자초를 만들어 얹는 이…. 숨 가쁘게 돌아가고 나야 냉면그릇이 상 위에 올랐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것 같았다.
냉면 맛있게 하는 집을 찾아가 가뿐하게 먹곤 했던 나에게 그건 이상스런 장면이었다. 냉면 한 그릇을 먹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땀 흘리며 고생해야하다니…. 먹음직스러운 음식 한 그릇 뒤엔 오랜 준비와 헤아릴 수 없는 정성과 수고가 숨어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런 데다 함경도가 고향인 친정에서 먹던 함흥냉면하곤 퍽 다른 평양식냉면의 맛이 밍밍해서 나는 한동안 새댁의 냉면에 대해 비판적인 눈길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차츰, 담백하고 시원한 ‘새댁표’ 냉면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건 어느 냉면집도 흉내 낼 수 없는, 정성이 듬뿍 담긴 독특한 맛이었으니까.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 커다란 잔에 하나 가득 커피를 타주시던 시어머님도 안 계시고 신교동 옛집도 국수틀도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지나간 날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부정적이었던 감정은 불순물처럼 가라앉고, 오직 투명한 그리움만 남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잔칫집 같아 힘들었던 시댁의 번거로움이 생동감 넘치는 삶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냉면 만들던 날의 분주함이 빨리 돌아가는 무성영화처럼 눈앞을 스친다. 그 진한 삶의 장면들 속에서, 잃어버린 고향의 전통을 이어나가던 어머님의 의지가 이제 보인다.
추억은 세월이라는 옷을 입고야 제 본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보석인 줄 모르고 심드렁했다가 훗날 그것이 보석이었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 귀한 보석이라 철석같이 믿었는데 얼마 후 그건 번쩍이는 유리조각이었다는 걸 알기도 했다. 냉면을 만들던 날들은 긴 세월이 흐른 후에 더욱 반짝이는 귀한 보석이었다.
나는 뒤늦게 추억을 보듬어 안는다. 가슴이 촉촉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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