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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나의 블랙홀 / 김이경

나의 블랙홀 / 김이경


 

 

냉동실은 주먹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그곳엔 언제부터인지 얼린 고기니 생선뿐 아니라 고춧가루며 마른 멸치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곱게 찧은 마늘, 생강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말린 먹거리들도 냉동실을 더 좋아한다. 게다가 하루라도 거르면 큰일 나는 줄 아는 남편 때문에 미리 삶아놓은 고구마도 여러 봉지다. 끝없이 꺼내다 봉지 하나가 발등에 떨어졌다. 얼른 피했기 망정이지 자칫 사고가 날 뻔했다. 언제 넣어뒀는지도 모르는 사골국물이 돌덩이였다.

그 뿐 아니었다. 새우가루, 표고가루, 들깨가루, 찹쌀가루, 도토리가루 등 온갖 가루에다 풋고추, 홍고추, 말린 파뿌리와 양파껍질, 떡국과 만두. 슈퍼를 차려도 될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건 봐 줄만 했다. 먹다 남은 떡 조각, 케이크 조각, 서너 점 남은 족발에 이르러서는 기가 막혔다. 언제부턴지 냉동실은 아주 만만한 쓰레기통이 되어 있었다.

냉장실도 질세라 크고 작은 통으로 꽉 차 있었다. 김치 통이 딴 살림을 났는데도 무엇이 그리 비좁게 들어앉아 있는지. 된장 고추장, 장아찌와 피클, 젓갈은 물론 콩, , 참깨 등 온갖 곡식들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요즘 한창 맛들인 그릭요거트를 만드느라 드리퍼에 담은 요거트도 한몫했다.

채소 칸에는 사과 반 개, 반도막씩 남은 당근과 무, 대파 서너 뿌리처럼 금방 불려나갈 것도 있지만 비트나 콜라비처럼 느긋하게 뒹구는 것도 있었다. 비닐 지퍼 백에 꼭 갇혀서 세월을 잊은 대추도 있었다. 냉장고 하나에서 꺼내놓은 것이 웬만한 이삿짐이었다. 거기엔 내 게으름도 찐득하게 눌어붙어 잇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버릴 것을 골랐다. 꽁꽁 언 파란 돌덩이는 감태인지 매생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이름표가 떨어진 것인지 처음부터 안 써넣은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것들을 다시 녹여봐야 하나 생각하며 수상한 검은 봉지를 열었다. 세상에나! 사돈댁에서 보내온 자연산 송이와 더덕이 이끼와 함께 물러 있었다. 지난 추석에 산 큼직한 굴비 한 마리도 비닐봉지를 찢고 나와 성애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걸 아까워 어떻게 버린대?”

처음 냉장고를 샀던 때가 생각났다. 냉동실엔 다음 장날까지 먹을 생선 몇 마리, 비상용 고기 한 덩이면 충분했다. 냉동실의 중요한 임무는 얼음을 얼리는 것이었다. 수박화채라도 하려면 얼음덩어리를 바늘이나 송곳으로 깨뜨리며 부산을 떨 일이 없어졌다. 구슬이나 별 모양의 얼음 통에 물을 넣으면 알사탕 같은 얼음이 만들어졌다. 화채나 미숫가루 물에 동동 떠 있는 얼음은 냉장고가 귀하던 시절에 은근한 자존심이기도 했다.

냉장실의 주인은 단연 김치통과 물병이었다. 일주일이 멀다고 담그던 김치를 한 달에 한두 번만 담가도 되었고, 삼복더위에 얼음같이 차가운 물을 꺼내 마실 수도 있었다. 한나절도 못가는 감자뽁음이나 호박나물을 이틀이 지나서도 상에 올렸다.

냉장고에 두었던 건데.’

그러면서 알뜰한 살림 맛을 즐기기도 했다.

요즘은 생고기가 맛있다고 고기는 얼리지도 않는다. 김치통은 딴 살림을 난 지 오래다. 고런데도 냉장고는 터질 것만 같다. 다구나 지금의 냉장고는 처음 샀던 것보다 세 배도 넘게 크다. 조금씩 삶이 여유로워지면서 그만큼씩 자란 욕망처럼 점점 몸집을 키우며 냉장고는 전쟁이 나도 한동안은 문제없을 것 같은 대향 창고가 되었다. 냉장고에 있는 줄도 모르고 또 사오면 있던 것은 안으로 밀려들어가면서 잊힌다. 그러면 또 사오고 또 밀려들어가고. 그렇게 냉장고 속은 망각의 창고로도 변해가고 있다. 아니, 블랙홀이 되어있는 것이다.

문만 열면 한여름도 서늘해지던 냉기와 첫 만남. 그것은 상할 것 같은 반찬 몇 가지 앞에서 수줍은 유혹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욕망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마구잡이로 채워 넣은 것들은 욕심이었고 절약으로 포장된 낭비일 뿐이었다. 정리되지 못한 서툰 삶이었다. 그러다가 쓰레기통으로 전락하는 줄도 모르고 한없이 받아 심키는 블랙홀. 그 곳이 삶을 보관할 수 있는 곳이었던가.

문득 난 하루하루를 이렇게 냉장고에 밀어 넣듯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굴비를 내던져놓고 꽁치 도막이나 졸였던 나는 지금도 양파나 오이를 챙기느라 자연산 송이와 더덕이 물러지는 줄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리되지 못한 채 조금씩 밀려 들어간 시간들이 곰팡이가 피는지 성에가 끼는지 모르는 채 잊은 것은 아닌지. 햇볕이 그리운 기억들을 얼음 속에 가두어놓지는 않았는지. 그렇게 뒤섞어버린 시간과 기억들이 어느 순간 돌덩이가 되어 발등에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냉장고 깊은 곳에서 허옇게 곰팡이가 슬고 더러는 썩어버린 음식들이 적지 않았다. 냉장고 채소 칸의 세균이 변기 속보다 최대 1만 배나 많았다는 보도도 있던 터이니 냉장고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아니, 위태하기 짝이 없다. 그것들을 버리고 비워야 했다.

반이 넘게 버리고 나서야 정리가 끝났다,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그런데 삶의 창고는 아직도 블랙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