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꺾인 한국사를 슬퍼한다 / 전병덕
11월 둘째 토요일, 12만여 명 수험생들이 대입 논술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이날 서울 광화문과 시청 앞 일대에서 ‘민중 총궐기 대회’가 열렸다. 한국진보연대·민주노총·전교조 등 광우병 사태와 용산 참사, 제주 해군기지와 세월호 사건, 밀양 송전탑 등 이슈가 있을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전문 시위꾼 좌파 단체 53곳에서 10만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7시간여 동안이나 무법천지의 수라장을 만들며 도심을 마비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광우병 사태 이후 최대 인파라고 한다. 이들이 대입 논술시험을 치르는 날 기어이 시위를 행한 얄팍한 술수를 짐작 못할 바는 아니지만, 반정부 투쟁 캐치프레이즈 중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구호가 끼어 있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동북아역사재단’이라는 단체가 있다. 2006년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 역사 왜곡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다. 그런데 본래 취지와 무색하게 이 단체가 2012년 미국 의회조사국에 보낸 ‘상고사’ 등을 살펴보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식민사관에 동조하여 축소되고 왜곡된 ― 심지어 독도까지 누락한 고의성 자료를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오죽하면 2015년 8월 동북아역사재단의 해체를 주장하는 순수 민간 ‘역사의병대’까지 출범했을까.
역사 교과서 국정화 이념 논쟁이 뜨겁다. 갑론을박은 국론을 양분화하며 치킨게임으로 치닫고 있다. 반대쪽 의견이 다소 우세를 점하는 가운데 대학교수와 전교조 교사 등의 반대 성명이 이어지고, 어느 교육감은 근무 시간에 청와대를 찾아가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무지하고 무식하며 몽매한 탓이다. 그들의 주장은 국정화가 ‘친일 독재 미화’로 이어져 시대적 가치인 다양성을 말살한다는 유추로 집약된다. 그러나 남북으로 분단된 세계 유일 국가란 특수 상황 속에서, 6·25 전쟁의 처참한 상흔이 아직도 생생한 현실에서 ― 자유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서서 북한 전체주의를 추종하는 민중사관이 과연 얼마만큼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위한 다양성인지, 더 나아가 전국 2,300여 학교 중 단 3곳을 제외한 좌편향 독점 역사 교과서를 진정 건전한 견제와 균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인지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당시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에 떼로 몰려다니며 협박성 시위와 돌팔매질을 마다하지 않았다.
역사 교과서 논쟁은 조선 사색당쟁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없지 않다. 거기에 양시론과 양비론을 오가는 사이비 애국자들의 비루한 견해도 한몫 거든다. 2002년 검정 체제 도입 이후 2011년 완전 검정 체제로 전환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장 10여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섰으니 그 좌편향 민중사관의 뿌리가 어찌 쉬 뽑히려 하겠는가. 어쩌면 동북아역사재단이 전적으로 그 빌미를 제공했다고 볼 수도 있다. 역사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속담처럼 한줄기 흐름으로 진행된다. 그들이 사대사관(事大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벗어난, 자주적이며 미래 지향적으로 제대로 된 상고사를 기술했다면 현대사 또한 진즉에 모범 답안으로 매듭지어 졌을 가능성이 높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사학자였다. 우리나라 민족주의 사학의 효시로 지칭되는 그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에 독립 정신을 북돋우는, 강건하고 유려하며 웅혼하고 준열한 필치의 논설로 경향(京鄕) 각지에 문명을 떨쳤다. 국권 강탈 후에는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과 한국사 연구 등을 하였는데, 중국신문인 중화보(中華報)와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항일투쟁에 관한 논설을 싣기도 했다. 그의 논설로 판매 부수가 4∼5천 부 증가했다고 하니 가히 그 필력의 기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조선 상고사’는 그의 유작이다. 그는 한국사를 연구하며 추론만이 아닌 철저한 고증으로 단군왕검의 고조선이 신화가 아닌 실존의 역사였음을 밝히고 있다. 하여 단군을 신화로 격하시킨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김부식(金富軾)과 동국통감(東國通鑑)의 서거정(徐居正) 등을 사대사관에 찌든 협량한 인물로 준엄하게 꾸짖었으며,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의 삼국 통일에 대하여도 공죄(功罪)의 날카로운 비판을 거두지 않았다.
신채호와 김부식은 연개소문(淵蓋蘇文)에 대한 평가로 극명하게 엇갈린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을 왕을 시해한 무도한 역적으로 폄훼하며 기록마저 지나치게 인색하다. 이에 반해 신채호는 연개소문을 ‘독사신론’에서 우리나라 4,000년 역사 이래 제일의 영웅으로 극찬했다. 아직까지도 중국의 경극(京劇)에는 연개소문이 등장을 한다. 물론 선인이 아닌 악역으로 (다섯 개의 칼을 차고 당(唐) 태종(太宗)을 겁박하는) 포악하고 잔인하나 매우 용맹스러운 장수로 그려지고 있다. 김부식이 작정하고 폄론한 연개소문이 1,000여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그것도 중국인들에게 아직도 외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신채호는 기행으로도 꽤 이름이 높았다. 일본인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며 똑바로 선 채 세수를 하고, 서점에서 책장을 헤아리듯 훌훌 넘겼으나 그 내용을 다 기억했다는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개 역시 남달라 불의에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한 이승만(李承晩)을 정권욕에 눈이 먼 사이비로 치부하여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이승만은 신채호의 예측대로 친일파를 바탕으로 대통령이 되어 독재를 자행하고 6·25 등의 파란을 일으킨다. 만약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이병도와 신석호 등의 친일 어용 사학자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작태 또한 결코 없었으리라.
역사 교과서 국정화의 갈 길은 아직 요원하다. 그 선봉에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서 일제 관학자로, 식민사관에 세뇌되고 동조해 온 이병도(李丙燾)와 신석호(申奭鎬) 등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그들은 해방 이후에도 대학교수로, 국사편찬위원으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다는 미명하에― 조선 상고사를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등 일제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후진들에게 전수하고 답습시켜 왔다. 지금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대학교수나 전교조 교사들은 대부분 이들의 추종자나 아류로 보면 된다.
작금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는 절실한 과제로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 하여 현대사뿐만 아니라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 등을 준거로 상고사 또한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추측건대 지금 박근혜 정부에서 뒤틀린 역사를 바로 잡지 않는다면 다시는 정화의 시운이 도래하지 않으리라는 절박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신채호의 “꼭 써서 남겨야 할 원고를 머릿속에 넣어둔 채 죽는 것이 유감천만이다!” 외마디 한탄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러나 어쩌랴. 삼국일통의 시운이 고구려를 비껴 신라에 갔듯이, 한국사 또한 신채호를 비껴 이병도에게 간 것을.
단재는 해방을 5년 앞둔 1940년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다. 그의 나이 57세,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병보석을 거부하고 감옥에서 죽음을 감수한 그의 시린 절개에 나는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한번, 그것도 잠시 눈 한 번 깜빡였다면 대한의 한국사가 달라졌으리라. 어찌 감히 김부식과 이병도의 아류들이 설쳐대는 21세기 대한민국이 되었겠는가. 이제 그 누가 있어 대한의 역사를 바로 잡을 것인가. 그의 허무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슬퍼하며 날개 꺾인 한국사를 애도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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