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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빈 들에 서다 / 김잠복

빈 들에 서다 / 김잠복


 

 

나는 칠푼이다. 남편은 아내만을 걱정하는 팔푼이다. 둘은 바보가 되어 빈 들에 섰다. 세상은 고요하고, 마른 바람 소리뿐이다. 아랫도리에 힘을 주고 정신을 가다듬어 겨울바람을 맞고 있다. 연두색이 꼬물거리던 봄, 기름을 바른 듯한 녹색의 수런거림을 지나, 뒤란의 낙엽을 모아 태우고, 이제는 알 수 없는 나목(裸木)들의 소리만 들려오는 겨울 들판에 섰다.

혼자 동네 뒤 문수산을 향해 집을 나선다. 굴다리를 지나면 동네 시장이 나오고, 다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 비스듬히 드러누운 오솔길이 열린다. 아직 가을의 끝자락을 놓지 못하는 들국화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야위어진 육신으로도 그만의 향기를 풀어내고 있지만 머지않아 그도 지칠 것이다.

겨울 산이 나를 닮아 수척하다. 마른 풀, 망개나무, 상수리나무가 겨울잠에 들었다. 골짜기를 타고 올라온 찬 바람에 나무들이 감기 든 목쉰 소리를 한다. 모두가 잠이 깰까 봐 숨죽여 앞만 보고 걷는다. 잠시, 호흡을 늦추고 너럭바위로 가서 앉아 저만치 아래로 흐르는 태화강 물 위에 시선을 띄운다. 강물은 묵묵히 도시를 가로질러 길게 누워만 있다. 언제 보아도 변함이 없다.

여식이 떠난 지 다섯 해가 지났다. 다섯 번의 새순이 텄고, 다섯 번의 푸름이 펄럭댔고, 낙엽은 다섯 번이나 말없이 떨어져 그들의 시린 발목을 덮었었다. 다시 세상과 나는 이 겨울 나목이 되었다.

찬 바람이 불어도 겨울이 좋다. 나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가 간 오월은 더더욱 싫다. 내게 오월은 가혹하리만큼 잔인한 달이다.

여식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던 오월, 한 아름의 장미를 안고 내게로 왔었다. 유난히도 웃음이 맑았던 아이였다. 숱한 희망과 기쁨으로 온 세상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다, 피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홀연히 머나먼 곳으로 가 버렸다.

삼베 수의를 입은 채 잠자듯 누운 여식의 척추를 내 두 손으로 편안하게 눕혀 주었다. ‘부디 편히 잠들거라’ ‘사랑했다를 수도 없이 토하며 마른 흙으로 가슴을 따뜻이 눌러 주었다. 아침이면 까치 손님 찾아오고 낮이면 산비둘기 놀러 오는 그 무덤에 패랭이꽃을 한 다발 심었다. 풀 냄새를 키우고 더운 잔디에 물을 뿌리며 여름날을 지켰고, 서늘한 가을바람을 막으려 들국화를 사방으로 심었었다. 눈이 오는 날,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은 나를 애타게 찾았다. 달려가 웃옷으로 봉분을 덮어 주며 어미의 체온을 불어 넣고 있으면 편안했다.

아직은 내 안에 든 여식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잠시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자식이다. 육신의 이별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마음이 이별이라 했던가. 세상의 빈 공간에서 산을 익히고 하늘을 익히고 바람과 물을 익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꽃이 시드는 소리, 지는 소리, 세월이 고개를 넘으며 한숨 쉬는 소리를 들으며 보낸 시간들이다. 내게는 달빛, 별빛도 필요치 않다. 어둠이 세상을 지배했을 때가 차라리 편안하기 때문이다. 여식이 없는 세상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목련이라니. 산벚꽃이라니, 덩굴장미라니…….

아침에 일어나면 그래도 살아야지를 마음먹다가도 저녁이면 그냥 편안히 여식의 곁으로 가고픈 마음이었다. 여식이 간 곳을 나는 모른다. 그 누구 아는 이 없었다. 오로지 내게 보이는 건 넓고 비탈진 야산에 고 이은정의 묘라는 푯말밖에는…….

구름 한 조각 모이면 인연되어 살고, 그 구름 흩어지면 인연 다하느니.”라는 불가의 말씀을 위안으로도 삼아 본다. 여식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면 내 어찌하여 그 이치를 거부할 수 있으랴. 다행히 신은 다음 세상으로 연결하는 오묘한 능력이 있음을 내게 수도 없이 말해 주고 있다.

나는 점점 바보가 되어간다. 이 겨울, 육신에서는 수분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정신은 바람 부는 빈 들녘을 서성댄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나의 집은 망망대해의 외딴섬이나 진배없다. 오직 내 등뼈에만 의지한 채 세상과 마주 서야 한다. 세상은 한해살이 잡풀들이 낡은 무릎을 꿇고 숨죽여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빈 들 뿐이다. 내 거기서 세상 다하는 날까지 소리 내어 기도하리.

해 질 녘 산을 내려온다. ‘지금쯤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되어 가고 있을 육신이여, 부디 극락왕생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