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을 입다 / 박양자
오래전 이야기지만, 친분이 있는 모 국회의원의 부인이 백화점의 VIP고객이 아니라 이태원 보세상가나 동평화시장 등에서 옷을 사 입는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어느 좌중에서나 우아하고 세련된 맵시로 시선을 끄는 그녀의 패션 감각은 명품이 아니라 부지런한 발품과 이것저것을 섭렵해보는 시행착오 끝에 이루어진 노력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 여자의 남편이 야당 정치인으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는 지루하게 이어지는 군사정권 시절이어서 어느 세월에 빛을 보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녀는 외국 대사관에 근무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는데, 퇴근길에는 구멍가게마다 남편이 산 담배나 소주 등의 외상값이 줄줄이 그녀를 향해 손을 벌렸다고 한다.
고향 지역구에서 공천을 받아도 살벌한 공권력에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낙선의 고배만 들이키면서도 남편의 기세는 꺾일 줄 모르고, 급기야 그녀는 생활의 짐이 너물 버거워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이혼을 고려하게 된다.
‘두고 봐, 당신이 국회의원에 당선만 되면 그날로 바로 이혼해 줄 테니까.’
정치 중독에 빠진 남편과의 불협화음을 참아내며 수 없이 되뇌던 최후의 카드가 결별이었다. 그 암울한 시절을 버티게 해 준 그녀의 유일한 취미가 바로 옷 입기였는데,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특이한 디자인을 잘도 소화시킬 수 있는 몸매와 눈썰미 덕분에 보세 상가에서 잔돈푼으로 유럽풍의 정장도 사고 복고풍의 파티복도 샀다.
대사관저에서 자주 열리는 파티에선 최고의 댄싱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춤 솜씨뿐이랴. 시간과 장소에 따라, 계절에 맞춰 적절하게 차려입을 줄 아는 뛰어난 패션 감각이 춤 실력을 오죽이나 돋보이게 했을 것인가.
남편은 40대 후반에서야 끈질긴 도전 끝에 국회에 입성하고 부인의 내조를 받아 재선까지 성공한 후 화려한 은퇴를 했다는 근황을 언론 매체에서 들을 수 있었는데, 혹시나 하고 염려했던 이혼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부부가 정계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는 노는 물이 달라서인지 그녀를 만나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매의 눈으로 지금도 보세 상가를 기웃거릴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하면서 어느새 그녀를 따라 결코 평범하지 않은 나만의 옷 입기에 몰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창출해내야 하는 경제법칙이 패션에도 통용된다는 것을 그녀에게서 실전으로 배웠다.
구찌니 에르메스, 버버리 등 서구의 명품이 아니어도 감각 있는 신진 디자이너들은 우리의 다양한 미적 욕구를 채워주고 변신의 묘미를 일깨워준다.
어느 날, 동창모임에서 한 친구가 무신경하게 허드레 옷차림으로 나타나자 우리는 동시에 순간적인 불쾌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 느낌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를 소홀히 여기는 듯한, 그래서 친구로부터 정당하게 예우 받지 못한 듯한 서운함이었던 것 같다. 가까운 친구가 자녀의 결혼 청첩장을 건네면서 농담처럼 덧붙이는 말로 축의금 신경 쓰지 말고 옷 잘 입고 오라는 당부였다.
옷을 잘 입는다는 뜻은 부의 현시나 과시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양한 브랜드, 다채로운 색상과 디자인의 못과 액세서리들을 잘 섞어서 자신민의 스타일을 찾아내는 일이다.
세계적인 패셔니스타 스즈끼 하루오는 옷을 입을 때는 즐거워야 한다고 말한다. 검정이나 회색 등 단색의 정장만 고집하지 말고 연두색 바지나 분홍 재킷 등 과감하게 변화를 주고 도전한다면 새롭고 신선한 삶이 열린다고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나이를 거스를 수는 없지만 노화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수영이나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매를 유지하며 화사한 의상을 입은 68세 스즈끼의 모습이야말로 우리에게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옷 입기는 겉모습만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에너지 그 자체이며 타인과 소통하는 첫 번째 통로이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전략의 하나로 자신만의 스타일이나 컬러를 선택하는 행복한 고민을 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나는 좋아서 사고, 좋아서 입는다. 나이는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그 옷을 살 때 상상 속에서 이미 행복했기 때문에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 더러 있어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이에 주눅 들지 않는다. 청춘이 아닌 다른 나이에도 아름다움은 존재하다는 신념엔 변함이 없으므로.
매사 심드렁하고 우울하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대의 옷장을 바꿔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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