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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신세대 쉰 세대 / 박경대

신세대 쉰 세대 / 박경대




주문한 TV가 도착하였다. 설치기사가 DVD기기와 안테나 등을 연결 시켜주고 간 뒤,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도 작동이 되지 않았다. 시연을 할 때 잘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였다. 설명서는 글씨도 작고 두꺼워 던져 버리고 다시 리모컨으로 씨름을 하였다. 한참동안 만지다 보니 어느 순간 화면이 켜졌으나 어느 버턴을 눌러 켜졌는지도 몰랐다. 그 뒤, 며칠이 지나도 작동방법을 확실히 몰라 이리저리 누르다 켜지면 보았지만 내가 생각해도 한심스러웠다.

예전에는 전자제품을 구입하면 설명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고 제품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나이가 쉰을 넘어서자 차츰 설명서를 읽고 익히는 게 귀찮아졌다. 이른바 쉰 세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제품이 있어도 안내서는 건성으로 보고 그냥 어림짐작만으로 작동시킨다. 그러다 보니 제품의 다양한 기능은 알지 못하고 꼭 쓰는 기능만 사용하는 것이다.

한때는 전자제품을 분해하여 고치기도 했을 정도라 여태껏 별 어려움 없이 기기들을 사용하였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차츰 늘어나자 첨단제품에는 자신이 없어졌다. 요즘은 휴대폰도 자주 쓰는 기능만 쓰고 컴퓨터도 초보 수준이다.

학생들이 사용하는 MP3는 음성 재생 장치로 예전 녹음기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알지만 PDA는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도 모른다. 내비게이션 도 늘 아내에게 봐 달라고 하다 보니 업그레이드 하는 방법도 모른다. 기계를 만지는 것은 나름 자신 있었는데 왠지 차츰 기계치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오죽하면 정들었던 승용차를 얼마 전 바꾸면서 그제야 용도를 알았던 버턴까지 있었을까.

요즘은 트위트, 웹하드 같은 생소한 단어들이 난무하여 더욱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컴퓨터와 외국어를 모르면 바보가 될 것 같아 불안해진다. 신문이나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새로운 용어들은 인터넷으로 검색도 하고 아이들에게 가끔씩 물어 보기도 한다. 한번은 미드소시라는 단어가 자주 들리기에 영어인가하고 사전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찾을 수 없어 컴퓨터로 검색해보았더니 미드는 미국드라마, ‘소시는 소녀시대를 줄인 말이라는 것을 알고 허망하게 웃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보니 요즘은 방송프로의 제목도 줄여서 말하는 것 같다. 신세대를 따라가려면 단어도 간단해야 되는가 보다.

주위에는 아직 이메일도 보내지 못하는 친구도 있고 휴대폰 문자도 활용하지 않는 친구도 있으니, 거기에 비하면 나는 아날로그세대 치고는 꽤 괜찮은 수준이다. 저장 장치인 USB도 사용하고 포토샵도 조금은 다룰 수 있으니 아직은 견딜만한데 차츰 자신이 없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또 하나 쉰 세대를 힘들게 하는 것이 숫자의 홍수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터넷 뱅킹을 한번 하려면 무슨 숫자를 그렇게 많이 누르라고 하는지 정신이 없다. 해킹이 많아진 요즘은 매일 바뀌는 카드의 비밀번호까지 봐야하니 갈수록 태산이다. 은행도 몇 군데 거래하고 계좌도 여럿 가진 사람들은 수첩에 일일이 적어놓지 않으면 그 많은 숫자를 어찌 외울 수 있겠는가.

며칠 전, 모임에 갔다가 밤늦게 돌아올 때였다. 집에 들어가려다 보니 할머니 한분이 문 앞에 서 계셨다. 출입번호를 잊어버려서 입주민이 올 때 까지 기다리고 있던 중이셨다. 아파트마다 관리비를 줄인다고 경비원을 감축하고 방범용 문을 달아 놓은 후 가끔 보는 광경이다. 한 이십 년 쯤 후 출입 방법이 더 어려워지면 저 상황이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처량하고 한편으로 섬뜩했다.

몇 년 전, 청계천 공사가 완료되어 구경을 간 적이 있었다. 동대문 근처에서 지하도를 올라오는데 계단 중간에 걸인이 한명 엎드려 있었다. 돈을 한 푼 줄까하고 뒤져보니 동전이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그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그냥 모른 체 지나치는 순간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 나의 벨소리와는 달랐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가 싶어 두리번거리던 그때 그 걸인이 휴대폰을 꺼내어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휴대폰은 나의 것보다 훨씬 신형이었다. 도와주려고 동전을 찾던 내가 혼란스러워졌다. 계단을 다 올라 올 때쯤 정신이 돌아와서 한마디 중얼거렸다.

신세대 걸인은 뭔가 다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