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마 / 이재성
겨울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다. 이 짙은 안개를 휘저으며 삼사 백 리 먼 길을 되돌아 올 생각을 하니 걱정이 여간 아니다. 여느 때 같으면 엄두가 나지 않아 나중으로 미루거나 귀찮은 마음에 짜증을 내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사뭇 다르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길을 나선다. 그건 아마도 딸아이를 보고 싶은 마음이 몇 걸음 앞서서 그렇지 싶다.
객지에서 원룸을 얻어 놓고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는 녀석이다. 집을 다녀간 지가 길어 봐야 한 달 남짓 된 것 같은데 서너 달만큼이나 지난 듯이 길게 느껴진다. 지난번에 준비해 간 밑반찬도 떨어졌을 것 같고, 신종플루 때문에 온 나라가 어수선하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괜찮다는 말을 전해 듣기는 하였지만, 먹는 것이 부실하여 얼굴이라도 야위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애들 엄마는 어제, 딸에게 보낼 짐을 챙기느라 밤이 이슥하도록 종종걸음을 했다. 국물을 좋아한다며 육개장을 듬뿍 끓여 한 끼니에 한 봉지씩 간편하게 꺼내 먹을 수 있도록 포장을 하는가 하면, 사과며 곶감, 참기름, 들기름, 무말랭이 등 하다못해 자질구레한 화장지까지 챙긴다. 내 집 살림은 아예 뒷전인 듯 장만한 보따리가 올망졸망 쌓였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려 보겠다고 이 고생이냐며 구시렁거리기도 하고 볼멘소릴 하지만 얼굴 표정만은 마냥 즐거워 보인다. 이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이지 싶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모두를 자식에게 주고 싶어 하고 아까워하지도 않는 마음이다. 내 배는 곯아도 자식들이 오물거리며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배가 부르고 행복해진다.
우리 아버지도 그리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아버지가 베풀어 주신 것에 비하면 우리들은 그 흉내도 못 낸다. 그것과 견주어서 생각하는 것조차 어찌 감히 할 수 있을까. 자식들 남매를 애지중지 키우면서 정을 주고 대견해 하였지만, 때로는 뒷바리지 하기가 힘에 버거워 종종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옛 모습을 떠올리면 언제나 숙연해져 내색을 할 수가 없다.
아버지는 글을 배울 기회가 없어서 학력으로 따지자면 무학이었다. 서당도 한번 기웃거려보질 못하였지만 다행히 어깨너머로나마 한글은 깨우쳐서, 긴 겨울밤이면 할머니나 어머니 앞에서 얘기책을 종종 읽어 주기도 하셨다. 구수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읽으면서도 감정이 있고 장단이 있어 꼭 신파극을 보는 듯하여 옆에서 듣는 사람들은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고 ‘쯧쯔쯔’ 하며 혀를 찰 때도 있었다.
글을 깨우치고 지식을 넓혀야 한다는 것을 뼈저린 체험으로 터득하셨던 것 같다.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하였다. 형의 친구들은 땟국물을 흘리며 조그만 서당 문을 들락거릴 때에 형은 제천읍내에서 가장 큰 중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중학교라고 해 보아야 달랑 두 개 학교뿐이었지만.
큰아들인 형을 읍내 중학교에 입학시키면서부터 눈에 띄게 비춰진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생각할 때마다 콧등이 시큰해진다. 1960년대 초의 일이니 참으로 아득하고 먼 나라 얘기 같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커다란 국책사업을 시작도 하기 전이다. 신작로라고 해보아야 자갈밭이었고 제천에서 충주로 오고 가는 버스가 하루에 한두 번 지나다닐 정도였으니 교통수단이라고는 아예 없는 걸로 알며 체념하고 살던 시절이다.
읍내의 서부동에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 놓고 할머니가 따라 가서 형의 뒷바라지를 해주셨는데, 연탄도 살 수 없는 형편이라 땔감마저 조달을 해 주어야 했다. 장작을 말려 짧고 가늘게 쪼개서 짚으로 엮은 가마니에 차곡차곡 담아 소의 길맛가지 위에 얹어 실어 날라야 했다. 우마차나 손수레는 온 동네에도 없었다. 육칠십 리나 되는 먼지 나는 자갈길을 걸어서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쯤 된 어느 여름의 휴일이었다. 어느새 떨어진 땔감나무를 가져다 줄 때가 되었다며 집을 나서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같이 나섰다. 멀고 험한 길을 따라나서는 어린 자식이 애처롭고 걱정이 되었는지 말리셨지만 때를 썼다. 길마 위에는 장작 가마니가 양쪽으로 나뉘어 실렸고 가운데 틈새에는 쌀 한 자루와 점심에 먹일 소의 여물까지 실려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무엇으로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자식 사랑이 얹혀 있었던 것을 그때는 왜 그것을 못 보았는지 모르겠다.
‘슴매’ 큰 개울에 놓여 있던 섶 다리는 봄장마가 이미 삼켜버린 뒤였다. 아버지는 한 손으로 날 들춰 업고 다른 손으로는 소를 몰려 물 때 앉은 여울 살 자갈길을 멀끄덩 거리며 건넜다. 우수수 흘러내리는 토끼길 같은 ‘달랑’ 고개를 오를 때는 헐떡거리는 소가 안쓰러워 길마의 뒤를 떠밀어 주며 오르기도 했다. 인적이 드문 ‘유서낭 거리’까지 나오는 시오리 길은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그나마 즐거웠던 것 같다.
신작로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버지는 걸어가는 내내 사방을 힐금거리며 불안해하셨다. 특히 봉양 삼거리에 있는 검문소를 지날 때에는 매우 겁을 먹어 질려 있는 듯 보였다. 죄지은 것 없어도 순경을 만나면 괜히 겁을 먹고 주눅이 들던 시절이었다. 나는 덩달아 겁을 먹고 아버지의 허리춤에 매달리며 끌려가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검문소를 지나 산허리를 한 구비 돌아가서야 궁금해 하는 어린 자식의 손을 꼭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을 해주셨다. 땔나무를 하다가 산감(山監)이나 순경에게 발각이 되면 징역을 살아야 한다고…. 그때 아버지의 손바닥에 흥건히 고였던 물기는 더위에 지쳐서 흘러나온 땀이었을까?
새벽같이 출발하면 쉬지 않고 걸어도 점심때나 돼서야 도착할 수 있었고 점심 한술 먹으면 또 그 길을 되돌아와야 했다. 포악을 부리며 쏟아 붓는 땡볕에 하늘만큼 커다란 미루나무 가로수도 지쳐 흐느적거리는 길이었다. 멀고도 지루했다. 초저녁달을 호롱불 삼아 삽작문을 들어서면 녹초가 되었다. 신작로의 흙먼지를 온종일 뒤집어썼으니 흙투성이가 되었고 발은 다 부르터 있었다. 등에는 땀띠가 발갛도록 돋아 쓰라렸다. 그 후로도 몇 년이나 더 그 힘든 일을 아버지께서는 묵묵히 하셨다. 내가 만일 그런 일을 감당해야 할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길마를 타고 가는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목숨을 건 연어의 몸부림과 같은 것이었겠지 싶다. 반질반질하도록 윤기가 흐르던 길마는 켜켜이 쌓인 아버지의 찝찔한 골수가 흥건하게 배인 상처의 흔적이었으리라. 이승을 떠나신 지 몇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사랑은 목을 메이게 한다. 오늘도 소고삐를 놓지 못하신 채 중년의 끝자락에 서 있는 자식이 못 미더워 기억의 강을 건너와 길동무까지 해주셨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올랐다. 그저 인자하게 웃으시며 안개 따라 이제 또 떠나신다. 늘상 흥얼거리시던 ‘어랑 타령’도 한 곡 듣고 싶은데….
허전한 그 자리에는 딸아이가 웃고 있다. 어느새 어엿한 숙녀가 되어버린 녀석이 “아빠, 아빠” 하며 아양을 떨 때면 겁이 덜컹 나서 슬그머니 지갑 두께부터 살펴보게 된다. 그래도 싫지가 않다. 아직은 아버지가 필요하여 의지하려는 것이니 아비로서 해 줘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좋다. 오늘도 꼬깃꼬깃한 비상금 오만 원을 몽땅 털리고 빈 지갑만 남았다. 돌아서며 울먹이는 딸아이의 눈망울이 아직은 아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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