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김치 / 김순동
김치가 없는 상차림을 생각해 보셨나요. 세계는 점점 우리의 김치에 익숙해지고 있다. 관광 온 외국인들이 광장에 나와 김치를 버무린다. 채소의 모듬식품이며, 살아있는 젖산균수는 서양의 요구르트를 능가한다. 조직 속으로 스며든 수소는 수소수가 되며, 톡 쏘는 맛은 청량음료를 방불케 한다.
발효 초기에는 젖산 이외에 탄산가스와 수소를 생성하는 이상발효를, 후기에는 젖산만을 생성하는 정상발효를 한다. 젖산균의 까다로운 식성을 맞추는 것이 김치발효의 핵심이다. 비타민 B1이 풍부한 마늘과 아미노산이 많은 젓갈을 넣는 것이 그 이유이다. 젓갈의 비린 맛은 생강이나 고춧가루로 잡는다.
얼마 전 심한 고혈압으로 저염식을 하는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농장에 자란 민들레로 소금을 넣지 않은 김치를 만들 수는 있느냐고 물었다. 만들 수 있다고 대답은 했으나 머리와 입은 따로 놀았다. 입으로 방법을 설명하는 동안 머리에는 오래전 민들레김치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990년대였다. 친구 부인의 한국무용 팀이 프랑스 정부의 초청을 받았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무료숙식을 하면서 전통무용을 공연하는데 무용과는 무관한 6명의 남자 교수가 동참하게 되었다. 우리가 떳떳이 참여할 수 있도록 사물놀이, 장구춤, 부채춤, 학춤 외에 농악을 추가하였다. 농악에 필요한 꽹과리와 징, 피리, 상모돌리기 연습도 무용 팀에서 준비를 했다. 우리는 농자천하지대본을 쓴 깃발을 드는 것이나 수염을 달고, 갓이나 탈을 쓰고 무용 팀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목적지인 프랑스 몽뚜와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숙소는 초등학교 강당에 준비되어 있었다. 짐들을 침대 옆에 세워둔 채 학생들을 따라 식당으로 갔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몇 나라에서 사람들이 먼저 와있었다. 배식창구에 둔 바게트와 치즈를 집어 식탁에 앉았다. 치즈에서 품어내는 고약한 냄새로 식사를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학생들은 눈을 맞추더니 준비해온 김치를 꺼내와 맛있는 식사를 했다. 거기다가 식탁위에 놓인 포도주를 김치를 안주로 몇 잔씩이나 마셨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모두가 술에 취하고 피로에 젖어 이내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일주일간씩 지역과 민박집을 바꿔가면서 무대공연과 거리공연을 했다. 그 지역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은 낮에는 잠을 자고 밤을 즐겼다. 밤의 축제는 횃불처럼 타올랐다. 여러 나라에서 온 팀들이 비가 올 때는 큰 텐트 속에서, 맑은 날에는 광장에 설치한 가설무대에서 공연을 했다.
관중들은 한복을 입은 아리따운 여학생들이 나비처럼 부드러운 몸짓으로 명화를 그리듯 하는 한국무용에 빠져들었다. 지역신문마다 공연장면과 인터뷰한 내용들로 지면을 채웠다.
공연이 끝나기가 무섭게 급식소로 달려가 줄을 섰다. 바게트, 치즈, 과일 그리고 포도주가 주 메뉴였고 일주일에 한번쯤은 닭고기가 추가되었다. 치즈가 입에 맞지 않는 학생들은 난감했다. 준비해온 김치가 동이 난지 오래돼 모두가 김치를 먹고 싶어 했다.
식사가 끝나자 몇 학생들이 내게 다가와 교양과목에서 김치강의를 들었다고 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김치를 만들어달라는 무언의 압력처럼 느껴졌다. 학생들에게 김치를 담가서 선물할 테니 담을 용기나 준비하라고 했다. 큰 소리를 쳤지만 마을 주변 어디에도 소금이외는 재료들을 구할 수 없었다.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루아르강을 돌아봤다. 폭이 넓지 않은 강에는 강둑을 반쯤 채워 물이 흘렀다. 다행히 강 주변에는 노랑꽃이 핀 민들레가 밭을 이루고 있었다. 강렬한 햇살을 받아 억세고 질긴 잎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다음 날 공연이 시작되기 전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강변으로 갔다. 민들레를 한 움큼씩 잡아채어 묶어서 자루에 넣었다. 금방 자루가 꽉 차 숙소로 메고 왔다. 억센 잎으로 김치를 담글 때는 소금을 많이 쳐야했다. 하지만 소금을 많이 치면 짠맛이 강해 씻어내어야 하고 씻어낼 때 영양분이 빠져나가 맛없는 김치가 될 것이 분명했다.
반으로 자른 민들레를 한 움큼씩 잡아 젖은 물수건을 짜듯 손으로 비틀고 비벼 숨을 죽였다. 소금 양을 줄이기 위해 소금의 일을 도운 것이다. 그런 다음 짜지 않을 정도로 소금을 골고루 뿌려 학생들이 준비해 온 용기에 눌러 담았다. 숙성되면 먹으라고 당부도 했다.
어느 날 교수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코를 심하게 골아 잠을 잘 수 없어 일어난 일이다. 짝을 하루씩 바꾸기로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불평이 가장 많았던 그 교수가 가장 심하게 코를 골은 것이다. 그가 코를 골 때면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 창문이 떨렸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코 고는지를 모르고 세상의 인심같이 남이 고는 콧소리만 들은 것이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인솔자가 있는 숙소에 모여 달라고 말했다. 양주와 민들레김치를 내놓았다. 코골이 교수는 술을 마시지 않은 채 김치만 먹어댔다. 모두들 쓴맛, 신맛, 짠맛의 조화를 이루는 난생 처음 맛보는 김치에 찬사를 보냈다. 김치 한 잎사귀를 먹으려면 양주 한잔을 원 샷으로 해야 한다고 누가 말했다. 코골이 교수는 연거푸 두 잔을 마셨다. 피곤하면 모두 코골이가 된다고 하면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민들레김치를 안주삼아 양주 한 병을 비우고 포도주도 몇 잔씩을 마셨다. 그렇게 맛의 조화를 이룬 민들레김치처럼 그간의 갈등이 해소되었다.
소금만을 넣어 담근 민들레김치가 한 동안 입맛을 지켜 주었고 갈등에 감초 역할을 한 것 같아 식품가공학과 교수로서 체면이 선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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