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점(眼鏡店)의 그레트헨 / 김창식
서울, 19xx년. 겨울 세밑은 쓸쓸했다. 군대 가서 제대한 지 일 년여가 되어가고 있었던 나는 해질녘 어느 안경점에 있었다. 명동 입구 훈목薰木다방 옆에 있는 안경점을 찾은 것은 안경을 사려는 것이 아니었고, 안경다리가 귀를 누르는 바람에 상처가 나 고쳐 쓰려는 것이었다.
내 안경은 희끄무레한 회색 플라스틱 테 안경인데, 논산 수용연대에서 훈련소로 일제히 '팔려' 갈 적에 그 곳에서 만들어 준 것이었다. 흠집투성인 데다 낮은 포복, 높은 포복하느라 흙먼지가 안경테 사이에 견고하게 끼었고, 도수가 전혀 맞지 않은 애물단지였다.
군사훈련을 받으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희한한 세계에 적응하느라, 맞지 않은 안경에다 억지로 눈을 맞추느라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경에다 눈을 맞추라면 별 도리 없이 그리하는 것이 군대였다. 사격장에서는 동그란 과녁이 잘 보이지 않아서 대충 흰 표적 천에다 쏴대는 바람에 '숙달된 조교'에게 혼나기도 했다.
그 후 자대에 배치되어 세월을 죽이거나 꺾는 동안, 그래도 국방부 괘종시계는 하염없이 움직였고, 눈도 그런대로 안경에 적응하게 되어 제대 후에도 내처 쓰게 된 것이다. 아직 완전히 불편이 가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절엔 누구든 형편이 과히 좋지 않았고, 길이 든 안경을 어떠한 이유에서든 새 것으로 바꾼다는 것은 사치였다.
나는 주인아저씨가 내키지 않는 손놀림으로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며 앉아 있었는데, 왠 여자가 들어섰다. 그녀와 아저씨는 서로 구면인 듯 인사를 나누는 등 익숙한 분위기였다. 나는 여자를 본 순간 숨이 턱 막혔고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자는 20대는 넘은 것 같은데 어찌 보면 10대 아이로 보이기도 하였다. 나이가 잘 가늠되지 않은 수상스런 외모의 소유자였는데 지금까지 보아온 또는 상상해온 어떤 여자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녀를 대하니 내가 지금껏 마음에 두어왔던 몇몇의 여자들이 천박하게 느껴졌고 그들을 사모하였던 일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용모가 청순할 뿐 아니라, 환영인 듯 착각인듯 그녀 주위를 은은한 빛이 감싸고돌아 성聖처녀 같았다. 열심히 머릿속으로 비슷한 사람을 찾아보았는데 마땅한 사람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그레이스 켈리, 오드리 헵번, 올리비아 하세, 베아트리체, 잔 다르크… 영화배우들은 아무래도 신선미가 떨어졌고, 단테의 연인은 너무 어렸다. 오를레앙의 처녀는 너무 강인하였으며… 그때 그레트헨이 떠올랐다.
그레트 헨을 생각해 낸 것은 사실 늦은 감이 있었다. 학교에 복학하여 그해 2학기 때 '파우스트'를 배웠던 것이다. "멈추어라 시간이여, 너는 정말 아름답도다!" 나는 유명한 극시劇詩에 나오는 파우스트의 끝 장면 대사를 외쳤는데 하마터면 말이 되어 나올 뻔하였다. 나는 계속하여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을 마음속으로 암송하였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천사들의 합창이 장엄히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 그녀라면 내 안경처럼 볼품없고 허섭스레기 같은 영혼을 높은 곳으로 인도하리라.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친척 아저씨로 보이는 일행이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 남자는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 또한 일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선그라스를 사려는 듯 쇼윈도 속의 안경테를 이것저것 가리키다가 꺼내 써보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면 동행한 남자에게 조언을 구하려는 듯 얼굴을 반쯤 돌리며 멋지게 포즈를 취하였다. 그녀가 선그라스를 꼈다 벗음에 따라 얼굴이 감추어졌다 드러났다 했는데 무슨 역용마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나는 넋을 잃고 그녀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모든 동작을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줄곧 가벼운 미소만 띤 채 우아한 고갯짓과 눈으로 그의 의사를 물었다. 그 남자는 스포츠 머리에 시골 정미소 주인 타입인 초로의 사내였는데, 손에 다이아로 보이는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 역시 말을 아꼈고 그저 침묵으로만 호好, 불호不好를 표시하였다. 여자가 남자에게 안경을 낀 채 살포시 고개를 기울여 꽃처럼 웃으면, 남자는 그저 "음, 음" 고개를 끄덕이거나 난처한 표정을 짓거나, 그저 행동거지로만 수용 또는 불가의 뜻을 나타내었다.
그것은 기묘한 풍경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말 못하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색한 커플의 무언극은 잠시 더 계속 되었는데 음이 소고된 슬로비디오 화면을 보듯 현실감이 없었고 막막하였다. 이윽고 그녀가 안경 하나를 집어 들었고, 남자는 흡족한 듯 웃었는데 금이빨이 보였다. 아저씨가 수신호로 가격을 말하자 남자가 지불하였다. 그녀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안경점을 떠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문을 통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바람이 밀어 닥쳤고.
나는 한바탕 헛된 꿈을 꾼 것이었거나 미美의 정精靈에 미혹 되었던 듯하다. 아저씨가 안경 수리를 끝내었지만 맥이 빠져 잠시 더 그곳에 머물렀다. 이윽고 대충 정신을 수습하며 일어섰다. 나는 무언가 알 듯도 하였지만 제발 그 생각이 틀리기만을 바라며 아저씨에게 물었다.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부녀지간인 모양이죠?"
아저씨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였다. 딱히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남자가 일본 사람이에요. 가끔 와요"
안경점을 나서니 코끝이 맵싸했다. 거리는 물결, 사람의 물결이었다. 한켠에는 제복을 입은 구세군이 종을 치고 이었고 사람들은 코트 깃에 목을 파묻은 채 달력을 몇 개씩 말아 쥐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온 세상아 주님을 경배하라!" 레코드 가게에서는 성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안경을 부셔져라 움켜쥐고 까닭 모를 설움에 목이 메어 찬바람 도는 명동의 뒷골목을 헤매었다. 서울 19xx 년. 겨울 세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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