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테라피 / 손훈영
산을 끼고 있는 거실 창은 절기마다 다른 그림을 내다 건다. 지금 창에는 절정의 단풍이 그려져 있다. 온통 울긋불긋하다. 저 색깔이 거슬려 이 계절이 지나갔으면 싶다. 단풍놀이 가는 사람들에게 단풍이 진짜 아름답다 생각해서 가는 것인지 일일이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어제는 오래 전에 사 놓은 스웨터를 처음으로 입고 나갔다. 붉은 색이었다. 화려하고 열정적인 색이 뜨거운 심장을 걸친 느낌을 불러일으켜 주었기에 불현듯 구입한 것이었다. 그런데 붉은 스웨터를 입고 돌아다니는 동안 내내 그 색이 걸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치 삐에로가 된 느낌이었다. 상가 건물에 비친 붉은 스웨터가 내 눈을 찌를 때마다 한시 바삐 볼일을 보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소파 위로 확 벗어던진 붉은 허물 같은 스웨터를 보고 있자니 얼마 전 골방으로 옮겨버린 캐비닛 생각이 났다. 거실장 높이의 나지막한 캐비닛이 쓰임새도 디자인도 다 합격점인 가구였다. 단지 빨간 색깔이 문제였다. 어디에 놓아도 그 빨간 색은 제 존재를 주장하고 나섰다. 가구 주제에 주장씩이라니. 그 주장이 못내 거슬렸다. 주장은 돌출이고 잘난 체고 불협화음이었다. 집 안 가구 중 어느 것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았다.
붉은 스웨터가 딱 그 캐비닛 꼴이었다. 옷이란 주인하고 어우러져 좋은 느낌을 연출해주면 제 소임을 다 하는 것이다. 무에 그리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어 그리도 돌출을 감행하는가. 옷이 주인과 어우러지지 못한다는 것은 옷으로서의 중대한 결격사유다.
허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격사유의 책임은 그 색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색깔을 감당하지 못하는 내 마음에 있는 것 같다. 아무리 피부색이 어울리고 돋보이게 해주는 옷 색깔이라도 결국 색깔은 마음으로 입는다. 천금이라 해도 마음이 싫으면 금이 아니라 똥 덩어리가 되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옷은 입고 있는 사람에 대해 외치게 마련인데 내 안에는 붉은 스웨터의 빨강이 없다 정열이 없고 흥분이 없고 뜨거운 피가 없다. 붉은 스웨터는 나 아닌 나를 강력하게 부르짖고 있는 꼴이다.
그렇다면 내 마음과 편안하게 어우러지는 내 안의 색은 무엇인가. 더 생각할 것도 없다. 바로 검은 색이다. 잎 떨군 나무들이 야윈 몸으로 묵언수행에 들어가고 빈 가지 끝에 서너 채의 까치집이 오두마니 얹혀 있는 한겨울 풍경은 내가 가장 편애하는 전망이다. 그때 창은 창이 아니라 한 폭의 수묵화다 침묵과 응시의 색깔. 모든 색을 다 압축한 검정과 갈색의 덩어리로, 인생을 은유하는 색깔이 그곳에 있다.
검정에 가까운 보라, 명도 채도가 다 낮은 풀색과 갈색은 내 색상 선택의 바로미터다. 잘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색, 내 무의식이 선택하는 색. 이 색들은 세밀하게는 다른 색깔로 분류되지만 색깔을 받아들이는 내 심리적 스펙트럼 안에서는 다 검정 톤이다. 미묘한 차이를 즐길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검정들이다.
줄곧 입는 검정 옷으로 인해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검정 좀 탈피하라는 말을 들을 때면 때때로 서운해질 때도 있다. ‘너희들이 내 검정을 알아?’ 이해 받지 못해 샐쭉한 마음은 ‘뉴욕의 한다하는 패셔니스타들은 다 올 불랙all black’이라며 응수하곤 한다.
오랜 세월 기 한 번 펴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누구보다 다감하고 열정적 인간인데 그 마음의 생기와 의욕을 다만 꺾이기만 하고 살아왔다. 정신이 병든 혈육은 불가항력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들도 눈을 뜨고 내 하루는 거친 불협화음이 질펀하게 쏟아지는 친정으로부터의 전화질로 시작되곤 했다. 전화벨 소리가 폭탄소리보다 더 무서웠지만 전화선을 끊으면 그들의 생명선을 끊는 것 같은 강박 속에서 내 세월을 다 보내버렸다.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기 위한 갖가지 심리 치유법들이 있다. 그 중 컬러 테라피라는 것도 있다. 색체의 전달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얻는 방법을 일컫는다. 컬러 테라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색이다. 필요에 따라 선별하여 사용하면 자극과 생기, 휴식과 진정을 얻을 수 있다.
나에게 치유의 색은 검정이다. 컬러풀한 색깔을 수용하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어둡고 염세적이기 때문일까. 슬플 때 슬픈 음악을 들어야 마음이 안정되듯 염세로 가라앉은 마음에는 조용한 검정이 최상의 색이다.
검정은 사제의 색이며 죽음의 예식을 위한 색, 애도를 위한 색이다. 끊임없이 욕망을 차단당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은 어떤 색을 선택할 수 있을까. 헐벗은 내 무의식은 아주 적절한 색을 선택했다. 검정이야말로 내 상실감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색이다.
검정 옷은 주위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종의 피난처가 되어 준다. 타인들과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해 편안하게 해주고 텅 빈 마음을 다독거려 숨길 수 있게 해준다. 상실의 쓰라림과 부재의 어둠은 검정과 동의어다. 무엇보다 검정색은 돌아갈 수 없는 상실감과 부재를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이해 받는다는 것만큼 큰 위로는 없다.
애도와 위로 없이 치료될 수 있는 상실감은 없다. 또한 부재를 존재로 바꿀 수도 없다. 잃어버린 내 삶에 대한 의식적인 애도의 시간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지금 여기서 안착하는 것이 되지 않았던 듯하다. 진정한 애도가 가능하려면 두렵지만 내 마음의 지하실 저 깊이까지 내려가 보아야 한다. 내적 진실이 도사리고 있는 밑바닥에 도달해야 한다. 그곳에서 만날 슬픔과 아픔, 부재의 핵을 용감하게 꿰뚫고 지나가야 한다.
전 존재를 다해 밀어붙여야 하는 이 일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색은 검정밖에 없다. 검정이야말로 내 안에서 압축된 힘을 솟구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응집된 힘만이 부재의 아픔으로부터 나를 건져 올릴 수 있다.
오늘도 검정 옷을 걸치고 하루를 산다. 글을 쓰고 영화를 본다. 밥을 하고 산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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