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 노혜숙
그것은 단순한 생활도구가 아니었다. 우아한 곡선과 날카로운 직선이 조화를 이루었고, 실용성과 미의 균형도 빼어났다. 탁월한 예술적 감각과 위엄을 갖춘 명품이었다. 사람들은 그 가위를 ‘한나 드 로스차일드’ 가문의 ‘왕관 가위’라고 불렀다.
진안 가위 박물관에는 동서양을 망라한 천오백여 점의 희귀 가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장 오래된 가위는 기원전 1000년경 그리스에서 만들었다는 양털 가위였다. 신라 시대 분황사 석탑에서 출토된 협가위에서부터 진안 수천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고려 시대 가위, 아이를 물어다 준다는 유렵의 헨켈 황새 가위, 빅토리아나 아르누보 같은 예술 가위, 그리고 보물로 지정죈 금동 초심지 가위까지 종류와 형태가 다양했다.
가위의 변천사 속에서 평범한 생활도구가 인간의 욕망과 혼을 담은 예술작품으로 진화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화의 물결 속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 소멸에 대한 저항, 멋의 향유 같은 인간 의지가 도도하게 깃들어 있었다. ‘왕관 가위’는 로스차일드 가문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살아남아 그 시대의 영욕과 자취를 대대로 전할 터였다.
가위는 일찌감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했다. 신화에는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세 여신이 나오는데, 운명의 실을 찾는 클로트와 그 실을 분배하는 라케시스, 그리고 실을 끊는 아트로포스다. 그들은 각각 한 사람의 수명을 정하고, 그가 겪어야 할 불행과 고통의 몫을 할당하며 죽는 순간을 결정한다. 아트로포스가 가차 없이 운명의 실을 자르는데 사용한 도구가 바로 가위다. 애초 모태로부터 나를 분리시킨 것도 가위일 텐데 그 생의 숨줄을 끊는 것 역시 가위라니! 가위로 시작해서 가위로 끝나는 게 인생이던가. 불가항력 속에 생성되고 소멸되는 생의 가위놀이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그럼에도 그 대책 없음 속에서 역동적으로 꽃 피는 것이 인생의 역설이기도 하다. 인간 의지는 고난 속에서 더 강렬한 힘을 발휘하지 않던가.
운명의 가위에 버금가는 유전자 교정 가위가 우리 시대에 출현했다. 어쩌면 그 가위는 신화 속 아트로포스 여신의 가위보다 더 두려운 존재인지 모른다. 2015년에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가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가 선정한 ‘올해의 혁신적인 기술’ 10개 중 최고 성과로 뽑혔다고 한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란 원하는 부위의 DNA를 정교하게 잘라내는 유전자 편집 기술을 말한다.
유전자 편집이라니, 이 얼마나 마법 같은 일인가. 관련 연구가들은 “크리스퍼 기술의 주된 관심은 인간 배아가 아니라 체세포에 적용해서 유전자나 세포 치료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맞춤형아기 출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간과할 수 없다. 원한다면 유전자 교정 가위를 사용해서 탁월한 두뇌와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는 것도 불가능한 꿈은 아닐 것이다. 장차 우월한 유전자만을 편집하여 제작한 인간들의 세상에 살게 될지 누가 알랴.
문제는 누구나 그 유전자 가위의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꿈의 실현은 가진 돈에 비례한다던가. 회의주의자들의 우려에 대해 관련 연구가들은 이렇게 대답할지 모른다. 벽을 뚫지 않고 어떻게 진보할 수 있겠는가. 물신은 또 이렇게 부추길 것이다. 윤리의식을 강화하고 성장시키는 유전자를 개빌, 인간성 균형을 이루게 하는 편집도 가능할 것이라고. 돈이 된다면 물신은 그 또한 기어이 이루어내고야 말리라. 인간은 단순히 기능과 효율로 판단할 수 없는 존엄성을 가진 존재다. 이기적 욕망에 의한 유전자 가위의 남용 가능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도 과제다.
어쩌면 가장 경계해야 할 가위는 내 안에 있는지 모른다. 가위를 통해 인간사의 맥락을 더듬다 맞닥뜨리게 된 것은 내 안의 가위였다. 민감한 센서를 가졌으나 이따금 오작동을 일으키는 불완전한 가위. 살아오는 동안 여러 관계를 재단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내 생의 귀한 손님들을 떠나보내기도 했다. 더러는 타자의 욕망을 내 욕망인 양 착각하며 진짜 욕망을 잘라버리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지극히 보통 인간인 내가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함으로써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우를 범한 것이다. 내 안의 불안과 결핍이 거기서 비롯되었으리라. 내가 들이댄 가위는 타인이 아니라 내 인생을 겨냥한 셈이었다.
수천 년 세월을 거슬러 듣는 가위의 전언은 명징했다.
‘운명의 가위는 피할 수 없겠지만 운명에 대한 자세는 재단할 수 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위놀이를 즐겨라. 인간의 다중성을 이해하고 오류를 기꺼이 받아들이라. 운명의 가위에 도전하는 크리스퍼 가위에 박수를 보내되 서늘한 눈으로 통찰하라. 결국 명품 인생은 제 욕망의 주체적 가위놀이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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