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산지 / 김재희
산자락을 따라 걸어가는 발걸음이 담방거린다. 늘 마음속으로만 상상해 오던 풍경 속으로 이미 풍덩 빠져 버린 모양이다.
절에 들어가려면 울타리가 없어도 반드시 그 문을 통과해야만 하고 그 무은 물에 잠겨 있었던, 문 양 옆으로 서 있는 왕버들은 허연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만큼이나 연륜이 있어 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손이 모아지는 경건함을 품고 있었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 속의 풍경을 상상하며 내딛는 발걸음이었다.
꼭 영화만을 생각하며 찾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아련한 물안개 속에 잠겨 수면 위에 자신의 속내를 오롯이 비추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 더 우선이었는지도 모른다. 계절의 변화를 겪을 때마다 색다르게 덧칠된 풍경의 아름다움을 참 많이 동경했다. 그러기를 몇 년, 모처럼 찾아 온 기회였기에 주산지에 대한 기대는 몇 겹의 날개옷을 입었다.
산굽이를 돌아 저수지 둑 언저리에 다다를 즈음까지 산세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상상 외의 그림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만큼 그곳의 풍경은 머릿속에 그려진 대로만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저수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펄럭이던 날개가 스스르 내려앉고 말았다. 물이 가득찬 저수지가 아니라 물결 모양의 줄띠가 그려진 메마른 땅이 면적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저수지였다. 전국적으로 최악의 가뭄이라는 사실이 그때서야 머릿속에 기어 들어와 모든 것을 헝클어뜨렸다.
헝클어진 머릿속을 따라 내려온 신경 줄이 어지럼증을 일으켰는지 발걸음에 맥이 빠진다. 수면에 멋진 가지의 그림자를 비춰 보이는 나무는 아무리 눈을 휘둘러보아도 없다. 오랜 세월을 살았던 흔적, 갖은 풍파를 비켜가며 이리저리 굽어져 아름다운 곡선으로 살아남은 가지들만 물 위에 곱게 드러나 있지 않았던가.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 심중의 무거운 짐들 중 어느 가지를 잘라내고 어느 가지를 살려내야 할지 알 수 있을것 같았었다. 나무의 밑동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내려다보는 수면 거울 앞에서 가지치기를 하며 정리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삭고 부러진 가지와 물 자국 자리가 허옇게 그려진 나무 밑동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버드나무라니! 그동안 물속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그 많은 잔뿌리가 얼키설키 얽히고 뭉개져 저리 흉한 모습일까. 안타까우면서도 보기에 뭐해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허탈해진 마음이 부러진 날개에 얹혀 끝없는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쳤다.
왜 그렇게 허탈했던 것일까. 모든 생물은 다 생사고락을 겪는다는 사실을 뒤로한 채 항상 아름다운 모습으로 있을 것이라는, 그러기만을 바라는 내 관념이 어쭙잖다. 현실은 언제나 예외라는 사실도 함께 품고 있어야만 하지 않던가. 그런데도 이미 들어와 박힌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가 나뒹굴고 말았다.
잠시 흔들린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들러보는 풍겨 속에서 멀리 수중에 떠 있었던 절이 클로즈업 된다. 영화 속 절에는 담이 없었다. 넓은 저수지 한가운데에 동그마니 떠 있던 절과 그곳을 향해 들어가는 물속에 대문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아무런 경계선이 없는 절과 문, 그런데도 그 절을 드나들 때는 꼭 문을 통과해햐만 하는 법칙이 주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을 일깨워 주는 장면들. 그것은 바로 우리네 삶에서 떼어 낼 수 없는 생사고락인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직접 눈에 보이는 곳에서 느끼는 감정보다 생각만으로 느끼는 감정의 깊이가 더 깊은지도 모른다. 그만큼 마음으로 즐기는 행복과 고통이 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결코 그런 관념에서 벗어나기란 힘든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을 그냥 껴안고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실망으로 인한 허망함을 갖기보다는 그동안 아름다움만을 상상했던 순간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며 역으로 고통스럽게 생각했던 일들에게서 탈피할 수 있는 순간엔 그 전환점을 기꺼이 고맙게 여겨야 할 것이다.
이제 철거되어 사라진 절 문 자리엔 늙은 버드나무 둥치가 그 자리이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언제쯤 저 저수지가 그득 차서 덤벙거리며 문턱을 넘어서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을지, 물이 찰랑거릴 때쯤 다시 찾아와야 할 것 같다. 아니, 내 마음속에 담 없는 대문 하나 만들어 놓고 그 문을 들랑거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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