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뿔 / 정태헌
구경꾼들이 몰려 있다. 동물원, 칠면조 원숭이 사자의 우리 앞엔 북새를 이루지만 말馬을 구경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애잔해선지 호젓함에 끌린 건지 마사馬舍 앞으로 다가선다. 말은 무리에서 벗어나면 외로움을 탄다는데, 벚꽃 흥건히 핀 봄철인지라 더욱 그렇겠다.
말은 짝다리로 선 채 눈을 감고 있고, 그런 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머리를 처박고 꼬리를 부르르 떨며 쫓겨 도망가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이제 우리 안에서 안도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 자세로 보아 꾸벅잠으로 졸고 있는 것 같다. 하긴 맹수에 쫓길 염려도 없으니 마음 놓고 통잠을 자도 되련만.
앉거나 누워서 졸아도 될 텐데 여전히 저런 짝다리라니. 우리 안이라 해도 저편에 맹수 소리가 가끔 들리니 차마 눕지 못하는 것인가. 말처럼 서서 자는 동물로는 기린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도망가는 것 말고는 자신을 지킬 재간이 별로 없다. 맹수의 습격을 받았을 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망치기 위해서는 잘 때조차 서서 잔다.
그렇다고 말들이 전부 서서 자는 것은 아니다. 초원에서 무리 지어 사는 말들을 보라. 어린 말들은 어미나 아비의 보호 아래 옆으로 누워 편안하게 잠을 잔다. 또 무리의 우두머리 격인 말도 누워서 잠을 잔다. 하지만 서열이 어정쩡한 말들은 서서 잘 수밖에 없다. 자면서도 가끔 눈을 떴다 감았다 하고, 귀도 연방 쫑긋거리며 주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눈과 귀가 연신 움직이는 말은, 잠을 자는 건지 움직이다가 멈춰선 것인지 그 부분은 어렵지 않다. 뒷다리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잠자는 발은 짝다리를 짚고 잔다. 불시의 습격에 대비한 자세다. 같은 초식동물인 소나 사슴은 뿔이라는 어쭙잖은 무기라도 있어 누워 자는 데 말이다.
말은 뒷발질이라도 할 수 있지 않으냐 한다면 그건 궁색함이리라. 소나 사슴의 뿡은 앞으로 돌진하며 쓰는 무기라면 말의 뒷발질은 더는 쫓아오지 말라는 애절한 방어의 몸짓이 아닌가. 신세가 생각보다 더 고달파 보인다. 말을 보며 신세가 크게 다를 바 없는 나도 짝다리를 짚어본다. 무람없는 자세지만 오래 서 있을 때 번갈아 짝다리를 짚으면 더 편하지 않던가.
구경꾼들은 어쩌다 흘끔거릴 뿐, 말 앞에 머문 발길은 여전히 뜨음하다. 말은 혼자서 심심도 하겠다. 게다가 말은 유독 겁 많기로 소문난 동물이지 않은가. 덩치는 크지만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고, 순간적인 움직임에도 즉각 반응한다. 뒤에서 무엇이 나타나거나 소리를 지르면 말은 본능적으로 방어에 들어간다. 빠른 속도를 이용해 자리를 피하거나 소리를 지르며 길길이 날뛰기도 한다. 그나마 빠른 다리라도 지녔으니 참 다행이겠다.
아카시아 녹음 사이로 떨어지는 한 줌 봄 햇살에 눈이 부시다. 잠에서 깼는지 말이 눈을 동실하게 뜬다. 이젠 내가 맞은편 그늘 벤치에 은근히 누워 본다. 나는 누워서 졸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말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하나 말처럼 잠시 졸 뿐, 어찌 깊은 잠에 빠질 수 있겠는가. 뿔이 없기는 피차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그래도 말은 달리는데 유용한 강인한 허파라도 지녔건만, 난 무슨 특기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구태여 붙이자면 갇혀 있지 않은 어쭙잖은 자유와 부실한 몸뚱이뿐이다. 어쩜 이렇게라도 누워 졸 수 있다는 게 분수에 넘치는 호사이리라.
뿔, 뿔, 뿔, 동물의 세계나 사람의 세계나 그놈의 뿔이 늘 말썽이다. 말은 공작의 꽁지깃, 사자의 송곳니, 원숭이의 긴 꼬리는 언감생심이라 외뿔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뿔이 없어 고달픈 것이 저뿐이 아니라는 걸 이젠 눈치를 챘을 것이다. 말은 갑자기 귀를 흔들어대며 긴 트림을 한다. 말은 귀에 영혼이 있다더니 내 생각을 들은 것일까. 난 얼른 진동걸음으로 그곳을 뜬다. 저편 솔수펑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 한 자락 찰랑찰랑 뒤를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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