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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소나무 숲에서 / 유정희

소나무 숲에서 / 유정희

 

 

 

광릉 숲 속을 거닐다 보면 기품 있고 기골이 장대한 소나무들을 만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당당히 서서 산객의 마음을 빼앗는다. 나무가 보낸 초대장을 받고 숲길을 걷는 호사를 하는 것 같다. 도열해 있는 소나무 거목들은 적잖은 세월 동안 뿌리내리고 있는 이 숲 속의 평화를 위해 초록빛 기도를 드리는 나무 성자의 모습이다.

어두컴컴한 소나무 숲 속엔 키 작은 잡목들과 풀들, 가장 낮은 자세로 내려다보아야만 눈에 띄는 이끼들도 있다. 이들은 밝은 태양을 선물로 받고 싶어도 거목들에 가려 늘 음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조물주가 주신 분복이 이것뿐이련 하고 사는 마음이 넉넉한 숲 속 가족들이다.

소나무 거목은 이른 봄이면 숲 속 식구들에게 봄님이 문턱에 와 있다고 봄비가 속삭여주던 소식을 알려 준다. 그리고는 어서 마른 가지에 물을 퍼 올려 새순 내보낼 채비를 서두르라 재촉한다. 봄 축제를 준비하라는 부탁이다.

기가 턱턱 막히고 산도 들도 펄펄 끓는 복지경엔 숲속 식구들에게 그늘을 드리워 더위를 피해 가게 해 준다. 빗물을 뿌리에 넉넉히 저장 했다 키 작은 숲 속 식구들이 목말라 애절한 눈길을 보낼 때, 약이나 진배없는 생명수를 목축일 만큼씩 나누어 준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품고 보듬어주듯, 거목은 나눔의 실천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천지를 뒤흔들며 천둥 번개라도 찾아올 때면 속수무책인 하늘의 재앙 앞에 희생양이 되어 장렬하게 쓰러지기도 하는 소나무 거목. 평생을 가족 위해 헌신하다 느닷없는 사고로 가족 곁을 떠나시는 어느 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사랑하다 한 몸 불사르고 떠나는 모습이 얼마나 장하고 뜻 깊고 아름다운 마무리인가. 하늘의 섭리에 순종하는 자연의 질서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사납게 달려드는 태풍이 삽시간에 온 산을 휘젓고 지나갈 때면 겁에 질린 숲 속 식구들의 비명이 들려온다. 그때 믿음직스럽게 하늘로 뻗은 소나무 거목들은 적장 앞을 가로막는 장수의 기세로 모든 어려움은 내가 다 막아낼 것이니 겁먹지 말고 힘내라.’며 온 숲을 지켜낸다. 늘 음지에서 쳐다만 보고 부러워만 했을 숲 속 식구들을 향한 따뜻한 배려와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거목다운 처세다.

철옹성처럼 버티면 더위가 물러나고 썰렁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철갑옷으로 무장한 소나무 거목들은 애써 마련한 고운 낙엽을 떨궈 숲 속 식구들을 덮어 주느라 부쩍 분주해진다. 혹독한 겨울이 밀어 닥칠 것이 분명하니 월동 준비를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직 남아있는 청청한 푸른빛을 버리지 않은 채 긴긴 겨울을 살아내며 삶의 모범을 보이기도 한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엄동설한이 몰려올 때면 모진 추위를 맨몸으로 막아내며 숲 속 식구들이 동사라도 할까 걱정이 태산이다. 논이 길같이 쌓이던 동지섣달 긴긴밤, 눈의 무게를 견디다 비명과 함께 제 몸을 저며 내는 고통을 겪을 때도 있다. 마치 숲 속 식구들을 사랑하다 죽어 가노라는 절규라도 하는 듯.

어느 날 오랜 세월을 살아낸 잘 생긴 아름드리 금강송 한 그루가 대목장의 눈에 띄었다. 간택 받게 되던 날 벌목꾼의 예리한 연장에 잘려 나가며 나무의 연륜도 함께 잘려 나가게 된다. 대목장과 벌목꾼은 거목이 최후를 맞이하기 전, 간단한 의식으로 좋은 곳으로 옮겨 갈 것이란 통고를 한 후 베어 내게 된다. 마침내 수백 년 된 아름드리 거목은 깊고 고요한 숲 속에 굉음을 남기며 길게 드러눕게 된다. 거짓 없이 살아오며 오랜 세월 쟁여 놓은 목향과 함께 나무의 영혼도 하늘로 비상했을 것이다.

휘영청 밝던 달빛과의 정겹던 이야기도, 보석같이 빛나던 별님과의 해맑은 만남도, 지저귀던 산새들의 노래와 숲 속 이웃들과의 이별의 아픔을 뒤로한 채 제2의 멋진 삶을 위해 떠나는 것이다.

숲이 있어 내가 사니, 내가 있어 숲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이다. 자연의 축복은 스스로 지킨 자에게 찾아오는 법이라 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 선택받은 날, 자연의 순리를 깊이 묵상하며 자연과 진한 사랑에 빠져 보리라. 숲의 행복이 살포시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