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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인정(人情)과 질서(秩序) / 임순자

인정(人情)과 질서(秩序) / 임순자

 

 

 

가을 날씨는 온도계가 말하는 것보다 몸에 더 춥게 닿는다. 전철역까지 한 시간 버스를 타야 하는데, 오늘은 시간이 늦은 데다 버스도 만원이다.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 왼손에 가방을 들고 오른손으로 천정 손잡이를 잡고 서서 간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앞뒤로 한 발씩 오가며 불안한 자세로, 앉은 사람을 둘러봐도 아무도 내릴 기색이 없다. 천정 손잡이를 잡은 팔도 가방을 든 손목도 아파서 손을 몇 번 바꾸다가 할 수 없어 가방을 내 앞에 앉은 빨간 점퍼 아주머니 의자 등받이 위에 얹고 한 손은 그 앞사람 등 뒤에 있는 손잡이를 잡았다.

얼마를 지나는 동안 몇 사람이 내리더니 한 정거장을 더 지나 빨간 점퍼 아주머니가 내리려고 일어선다. ‘옳지 됐다생각하는데, 아주머니가 나 보다 더 멀리 서 있는 다른 아주머니 손을 툭 치며 여기 앉으세요.”라고 권한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빨리 내려놓고 몸을 돌려 앉았다.“아니 저 아주머니가 먼저 앉았네, 아이고 감사해요 앉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하며 손을 잡고 인사들을 나눈다. 빨간 점퍼 아주머니는 내 쪽으로 눈도 주지 못하고 아래만 내려 보며 차에서 내린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 같진 않았다.

가까이 있는 내가 앉는 게 당연한데 왜 그랬을까. 그분이 나보다 연로하지도 않았고, 몸이 불편해 보이거나 어깨에 맨 작은 가방 외에 짐도 없었고, 어린아이를 대동하지도 않았다. ‘혹 내가 무례해 보였나. 자리 하나에 너무 집착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쳤나. 인상이 안 좋았나.’

우리국민은 정()이 많은 민족이다. 마음이 따뜻하고 동정심이 많다. 모처럼 귀한 음식이라도 생기면 넉넉지 않아도 이웃에게 돌리거나 초청하여 나눠 먹는다. 아무 관계없는 사람끼리 싸운다면 약한 편을 동정한다. 평소에 가깝지 않은 사이라도 타동네 사람과 경쟁이 생기면 우리 동네 사람을 응원한다. 길게 줄을 서서 순번을 기다리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서슴없이 자기 앞자리에 끼워 세운다. 모르는 사람일 때는 적대적이고 이기적이다가도 조그만 인연이라도 있는 사람으로 밝혀지면 훨씬 누그러지고 인심이 후해진다. 특히 같은 아픔을 지닌 사람을 만나면, 동병상린이 되어 자기 아픔처럼 아파하고 동정 베풀기를 아끼지 않는다.

반면, 준법, 질서, 원칙, 공의에는 약한 편이다. 정치, 경제는 물론 학계나 종교계에서조차 학연, 지연, 혈연끼리는 알뜰히 감싸고 챙긴다. 지역 간 계파 간 파벌이 심하고 자기편만 뭉치면서 갈등이 많아진다. 상대편에 대해서는 선입견이 앞서 시험해 보지도 않고 편견을 갖는다. 같은 계파임에도 그 안에서 분파가 될 땐 근원이 달랐던 원래적보다 아군끼리 적이 되기도 한다.

인정과 사랑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몸에 흐르는 피와 같다. 질서와 공의는 단체나 조직에서 뼈대와 같다. 단체나 개인 사이나 골격이 바로 서고 피가 잘 돌때 묵적을 이루며 영구적이 될 것이다.

나는 스트레스에 약하다. 남들에겐 별것도 아닌 일도 나에겐 무거운 짐이 된다. 남이 내게 잘못해도 스트레스를 받고, 내가 남에게 잘못해도 마음이 편치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의 상한선은 높고 하한선이 낮아 편안할 때가 많지 않다. 수양이 안 된 좁은 성격 탓일 게다. 그런데도 오늘은 별 자책이 없다. 버스는 대중교통수단이요, 승객이 좌석을 개인 소유인 양 지기 맘에 드는 사람에게 양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이다.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정당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버스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