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대한 단장(短章) / 알랭
우리에게 외투 정도로밖에는 관계가 없는 그러한 종류의 행복이 있다. 예를 들면 유산을 상속하거나 복권을 뽑아 한몫 보는 것이 그런 것이다. 명예도 그러하다. 명예는 우연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행복은 이와는 반대로 우리에게 합치된다. 우리가 그런 행복에 젖어 있는 것은 마치 양털이 붉은 색깔로 염색되어 있는 것 이상이다. 옛날의 현명한 사람들은 이웃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복을 구하였다.
그런데 오늘의 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자기 행복을 구하는 것은 고상한 일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덕(德)은 행복을 모욕한다고 가르치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다른 사람은 공동의 행복이 자기 행복의 참된 원천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여러 견해 가운데서 가장 공허한 것이다. 왜냐하면 마치 구멍이 뚫어진 그릇에 술이라도 부어넣는 것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행복을 부어넣는 것보다 더 공허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권태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반대로 조금도 탐내는 일이 없는 사람에게야말로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 스스로 강하고 행복한 사람은 타인에 의해 더욱 강해지고 행복해질 것이다. 그렇다. 행복한 사람들은 이득이 많은 장사나 거래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남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서는 자기 내부에 행복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행복해지려고 결단을 한 사람은 이러한 면을 잘 알아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는 사랑을 베풀지 않아도 된다. 자기 자신의 행복은 결코 덕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힘을 의미하는 이 덕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뜻하는 바와 같이 오히려 그 자체가 미덕인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한 의미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옷이라도 벗어서 집어던지는 것처럼 다른 행복 같은 것은 서슴지 않고 던져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참된 행복은 절대로 내던지지 않는다.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이를 위해 애쓸 필요가 있다.
다만 행복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놓기만 하고 방관자의 태도로 머물러 있으면서 행복이 저절로 찾아들기를 원한다면 서글픈 일이다. 비관주의의 본질은 단순한 불쾌감도 방임해 두면 슬픔과 초조감으로 변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행동은 욕구를 수반한다. 우리가 몸소 행하지 않는 것은 바랄 수 없으며, 고립무원의 기대는 언제나 서글픈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남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행복을 기다리고 있으면 사생활은 언제나 비참한 것이다.
누구나 가정의 폭군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기주의자는 자기 행복을 주워 사람들을 지배하는 법률로 삼는 것이라고 생각할 터이지만,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다. 사물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기주의자가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행복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있는 일상적인 번거로운 일이 하나도 없더라도 권태는 찾아오는 법이다. 그리하여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이기주의자가 강조하는 것은 권태와 불행의 법률이다. 이와는 반대로 유쾌한 마음을 갖는 사람에겐 어딘가 대범한 데가 있다. 그것은 받기보다는 차라리 주는 것이다.
우리가 남의 불행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역시 자기가 행복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것은 예의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이다. 예의란 내부에 대한 외부의 반작용에 의하여 곧 느낄 수 있는 외관상의 행복이다.
알랭(1868-1951) 프랑스의 사상가, 수필가 ‘노르망디의 어록’ ‘예술론집’ ‘종교론’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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