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송(老人頌) / 정비석
남보다 뛰어나게 노인을 존경하노라고 장담하기는 어려우나, 어느 편이냐 하면, 나는 역시 노인을 좋아하는 편이다. 머리와 구레나룻이 서릿발처럼 희고, 수척한 몸이 학같이 고담(枯淡)하게 늙으신 어른은 함부로 바라보기조차 외람하도록 거룩하거니와, 그다지 야하지 않을 정도로 수수하게만 늙으셨다면, 그 몸에 지닌 춘추(春秋)의 덕으로도, 우리는 노인을 우러러 모시어 마땅할 것 같다.
늙는다는 것이 무의미한 세월의 축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더해감에 따라 경험과 지혜와 덕성이 아울러 쌓여감을 말하는 것일진대, 노인들이 몸에 지니고 있는 겸양과 인내의 미덕은, 결코 일조일석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 장구한 시일을 두고 세파와 인정에 씻기고 닦인 연후의 기품일 게 분명하다. 그 더욱 귀하다 아니할 수 없겠다.
신을 완벽한 존재로 쳐서, 항상 신의 존재에 가까워지려고 애쓰는 것은 확실히 인간성의 갸륵한 일면이거니와, 사람으로서 신의 경지에 가장 가까울 수 있는 이도 역시 노인이 아닐 수 없다. 유교에서 경로사상을 고취한 것은, 단순히 장유(長幼)의 질서만을 유지하기 위한 한낱 도덕적 방편만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사람이 맑고 깨끗하게 늙기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는 하지마는, 집안에 귀하게 늙으신 어른을 모시는 일처럼 마음 흡족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귀하게 늙으신 어른을 그냥 노인이라기보다도 그분 자신이 세련된 교양의 표본이요, 연마된 인격의 역사적인 아름다움인 것이다.
덕망 높으신 노인을 가까이 모시고 앉았으면, 잠자코 있어도 변화 많은 역사의 자취를 눈앞에 보는 듯해서 마음이 절로 너그러워진다. 사물의 일시적 현상에 조금도 현혹되지 않고, 항상 정확한 관찰과 냉철한 판단으로 어려운 일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도, 노인들의 풍부한 경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안 될 것이니, 그토록 태연 부동하고 여유작작한 노인들의 태도는, 이미 그 태도 하나만으로도 젊은이들에게는 커다란 교훈인 것이다.
흔히들 이르기를, “사람은 늙을 것이 아니다.”는 말로, 노인들을 추하고 천하게 여기는 경향이 없지도 않으나, 이는 겉 꼴만 보고 안 꼴은 못 보는 지각없는 사람들의 비방일 뿐이지, 늙을수록 덕이 높아가고 마음이 정정하신 분이란, 언제나 거룩하고 귀한 존재인 것이다.
子曰, 吾十有五而志於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공자 말씀하기를, 내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에 몸을 세우고, 마흔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쉰에 하늘의 뜻을 깨닫고, 예순에 들리는 말이 거슬리는 데가 없고, 일흔에 마음먹은 대로 무슨 일을 하든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집안에 귀한 노인이 계시매 그 자손이 복되고, 나라에 귀한 노인이 많으매 그 국운이 흥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정비석(1911-1991) 소설가 소설집 ‘자유부인’ 수필 산정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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