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나무 남천을 품다 / 신송우
한 해의 마지막 절기인 대한에 절집을 찾았다. 매운 날씨 탓인지 인기척마저 없다. 겨울의 지루함을 떨쳐버리려는 동행인으로 절간의 고요가 깨어진다.
절 가운데에 서 있는 나무 아래가 갑자기 떠들썩하다. 모두가 그곳으로 우르르 모여든다. 나도 소리 나는 쪽이 궁금하여 달려갔다. 방문객들을 몰려가게 한 나무는 오랜 세월을 견뎌낸 매화나무이다. 굵은 둥치에 어머니가 부푼 젖가슴을 열고 새 생명을 키우듯 야리야리한 남천을 보듬고 있다. 남천이 어찌 다른 나무줄기의 움푹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 잡았을까. 모두 의아해한다. 남천은 매화나무가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남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마음에 끌렸을까. 정원이나 가로수로 오가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지낼 남천이 아니던가.
사계절 내내 잎을 달고 있는 남천을 처음 만났을 때다. 냇가 이름도 아니고 마을 이름도 아닌, 나무 이름치고는 좀 어색하게 다가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천은 중국의 따뜻한 남부지방이 원산지여서 그곳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했다.
남천은 봄에는 잎이 녹색을 띠고, 초여름에 줄기 끝에 하얀 꽃이 무리지어 핀다. 가을이 되면서 잎은 붉게 단풍이 들며, 빨간 구슬 같은 열매가 탐스럽게 주렁주렁 달린다. 한겨울에 빨간 열매가 더욱 자태를 뽐내는 식물이다.
매화나무 둥치에 남천은 어떻게 보금자리를 마련했을까. 산비둘기나 까치가 빨간 열매의 과육으로 굶주린 배를 채워준 대가로 씨앗을 매화나무둥치에 들러 붙인 기발한 방법이라도 사용했단 말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남천의 붉은 잎과 열매로 악귀를 물리치고 나쁜 기운을 막아 준다는 의미로 심었단 말인가.
매화나무는 남천을 어떻게 품었을까. 몸통에 삶의 터전을 내어준 고목은 속살의 아픔을 참아가며 남천을 기꺼이 받아 주었으리라. 지난날 형이 나에게 베풀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중학교 입시에 합격하고 입학 등록금 마감 날이었다.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진 부채로 어려운 가정을 꾸리느라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식 교육에 뒷바라지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는 나는 아버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그날 한나절이 되자, 형이 십리나 되는 산길을 걸어 땔감을 바지게 가득히 담아 왔다. 추운 날씨였건만 옷은 젖고 얼굴엔 땀으로 얼굴이 선연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형에게 입학 등록 마감일이라고 했다. 형은 몹시 놀란 표정으로 “왜 그런 중요한 일을 미리 알리지 않았느냐”며 나를 나무랐다. 그것도 잠시였다. 형은 생각에 잠기더니 점심도 거른 채 어디론가 달려갔다.
해질 무렵, 형은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립문을 열고 들어섰다. 가슴 조이며 기다렸을 나의 마음을 헤아렸다는 듯, 나를 감싸 안고는 말없이 등을 토닥거려주고는 입을 열었다. 형은 읍내 교육청에서 근무하던 친척을 찾아 사정을 얘기했다. 친척이 마련해 준 등록금을 손에 들고 고마움에 연신 고개를 숙였다. 입학 등록금 마감 시간에 혹시나 늦을세라 단걸음에 중학교로 달려갔다.
형은 맏이로 중학교 입학시험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나 가정 형편상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형은 자신이 못다 이룬 진학의 아픔을 세 명의 동생은 겪지 않기를 바라며, “내 몸의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너희들은 고등학교까지 마치도록 해 주겠다.”라고 약속했다. 돈 받을 사람들이 빚은 갚지 않으면서 동생들을 학교에 보낸다고 나무라면 “공부는 때가 있고 빚은 갚으면 된다.”라며 양해를 구했다. 채권자는 형의 말에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돌렸다. 형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약속을 꿋꿋하게 실천했다.
나는 형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중학교 수업료는 장학금으로 충당했으나 졸업을 앞두고 가정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사범대학으로 진학하겠다는 꿈을 접고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섬유 염색공장에 취직했다. 인근에 월세로 작은 방을 얻어 혼자 숙식을 해결하였다. 일주일 단위로 밤과 낮으로 열두 시간 교대 근무를 2년여 기간 동안 했다.
그러던 중 군 복무 통지서를 받고 신체검사를 하였다. 입대하기 전에 대학에 입학이라도 해두어야겠다며 회사를 그만 두었다. 입영을 앞두고 두 달 동안 독서실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해 대학입학 에비고사에 응시했다. 다행이도 예비고사에 합격하였다. 입학등록금이 적고 군 복무 면제를 받기 위해 교대에 지원하였으나 떨어지고 말았다. 한국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하고 한 학기를 마친 다음 입대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상경하여 뚝섬에 있는 섬유 가공회사에 입사하였다. 그러나 일부 봉급에 불만을 품은 사원들이 파업을 일으키자, 경영주는 공장을 폐쇄하였다. 다시 인천 3공단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하루 3교대 근무하며 대학 강의를 청취하고 틈틈이 공부했다.
대학 입학 후 7년 만에 한국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하였다. 내가 바라던 교원자격증을 손에 넣었을 때는 하늘을 날듯이 기뻤다. 얼마 후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꿈에 그리던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동생들도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이 되어 별 다른 탈이 없이 지냈다. 절 마당에 서서 남천을 품고 있는 저 매화나무처럼.
절간을 나서다 말고 뒤돌아 매화나무를 바라본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이겨내느라 틀어진 줄기에는 마른버짐 같은 이끼를 이고 있어 보가가 민망하다. 뿌리는 땅 위로 드러나 더욱 시려 보이고, 몸통도 질곡 같은 삶을 이겨낸 형의 등처럼 휘어져 안쓰럽다.
매화나무 우듬지가 이파리 하나 없이 살을 에는 바람에 흔들린다. 대한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싱싱한 남천을 품고 있는 매화나무다. 매화나무가 품고 안았듯이 형은 동생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난관도 이겨냈다. 어두컴컴한 터널을 벗어나면 그곳에 밝음이 있듯이 매화나무의 둥치에 뿌리를 내린 남천 때문인지 내 마음에 감동의 물결이 일어난다. 나의 형은 겨울 하늘을 지키고 서 있는 매화나무 등걸이었고, 나는 그 등걸에 안착한 남천이나 다름없다. 이제는 내가 형에게 보답할 차례가 아닌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형의 얼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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