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지 못한 죄罪 /조이섭
평상시와 다른 느낌이 가슴께를 간헐적으로 훑고 지나간다. 점점 통증이 심해지는가 싶더니 왼쪽 어깨에서 팔꿈치께로 저림이 내려오고 있다. 그냥 참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왠지 모를 무섬증이 스멀거린다.
살며시 밖으로 빠져나와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증상을 얘기하니, 다급한 목소리로 대학병원으로 곧바로 가라고 다그친다. 함께 식사 중이던 장 선생이 비상등을 켜고 출발한다. 승용차 안에서도 통증이 바늘로 찌르다 고자누룩하기를 되풀이한다. 다행히, 신천대로는 러시아워를 막 지난 시간이라 그리 막히지는 않는다.
심장마비가 틀림없다는 아들의 말이 귓전에 아른거린다. 왼쪽 가슴 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본다. 장 선생이 어떠냐고 눈짓으로 말한다. 견딜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이대로 생을 마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이 깜깜하다. 그때 생뚱맞은 기억 하나가 하늘에서 툭 떨어진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계주를 한 적이 있었다. 곗날이 되면, 계주는 집집이 가서 곗돈을 받았다. 그 대가로 계주는 마지막 달에 한 계좌를 타게 된다. 어느 날 저녁 답에 엄마가 밖에서 놀고 있던 나를 불렀다. 곗돈을 주기로 한 집에 가서 돈을 받아오라고 했다. 그 집에 가서 대문을 두드렸다. 아주머니가 초저녁잠에 취한 듯 부스스한 얼굴로 나와서 돈을 건네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그사이에 엄마가 다른 볼 일이 있었던지 집을 비우고 없었다. 나는 선걸음으로 조금 전 아이들과 놀았던 곳으로 달려가 다시 휩쓸렸다.
이튿날 학교에서 무심코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돈이 들어있었다. 엄마에게 전해주는 것을 깜박한 것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 좌판에는 아이들을 유혹하는 군것질거리가 넘쳐났다. 평소에는 일부러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그 날은 주머니에 든 돈을 만지작거리며 주춤거렸다. 이 돈으로 꿀빵 하나만 사 먹고 엄마에게 말하면 그냥 넘어가 주지 않을까. 아니, 미리 말을 안 하고 군것질했다고 매를 엄청나게 맞을지도 몰라. 이런저런 생각으로 만지작거리던 돈이 다 축축해지고 결국 달콤한 꿀빵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집에 와서 엄마 기분이 좋을 때를 가려 곗돈 축낸 것을 말하려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엄마는 어찌 된 일인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그러는 사이 호주머니에 있던 돈이 야금야금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그에 비례해서 엄마에게 이야기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간땡이가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나에게 심부름 보낸 것을 잊어버린 것이 틀림없어. 그런데 돈을 준 아주머니는 기억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하나. 나중에 밝혀지면 된통 혼이 날 테지만, 벌써 군것질로 써버린 돈이 상당한지라 이제 와서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되어 사달이 크게 나고 말았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우물쭈물하다 보니 남은 돈마저 야금야금 새어나갔다. 돈이 호주머니에서 모두 사라지자 급기야 곗돈을 유용한 일마저도 송두리째 잊어버리게 되었다.
한 달이 지나 다음 달 곗날이 되었다. 엄마는 그 아주머니가 내미는 한 달 치 곗돈을 보고 지난달 것도 달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지난달에 곗돈을 냈다고 했다. 엄마는 지난달에 대납을 했다고 적혀 있는 장부를 들이밀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줬다 안 받았다는 고함만 커질 뿐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 없는 살림에 적으나마 목돈이라도 만들어 볼까 한 푼 두 푼 아껴서 곗돈을 붓는 것인데 결코 가볍게 넘어갈 문제는 아니었다.
옆방에서 쪼그리고 앉아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나는 언제 들통이 나서 붙잡혀 갈까 봐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하나. 그러면 해결이야 되겠지만, 엄마한테 된통 혼이 날 것은 고사하고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아들 교육 잘못시켰다고 창피당할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날 선 승강이는 한나절을 훌쩍 넘겼지만, 그동안에도 솔직하게 잘못을 말하고 용서를 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주머니와 엄마는 각자가 천천히 생각해 보자는 말로 결론을 미루었다.
며칠 있다가 아주머니가 엄마를 찾아왔다. 누가 받으러 와서 돈을 줬지 싶은데 누구인지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장부에 대납했다고 쓰여 있으니 어쩔 수 없다며 지난달 곗돈을 엄마에게 건넸다. 나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바닥만 비벼댔다.
그날, 아주머니가 이른 초저녁잠을 자다가 비몽사몽간에 나에게 돈을 건네고 다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한 달 뒤에 돈을 안 받았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완강하게 우겨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돈을 누구에게 주었는지 기억이 아슴아슴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생돈을 다시 구해 왔을 것이다.
그 이후에 아주머니와 마주칠 때마다 어린아이 경기하듯이 제풀에 놀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주머니가 이사를 갔다. 횡령 사건은 그렇게 끝나 버렸지만, 어린 시절의 그 기억이 이따금 뾰족한 바늘로 변해서 폐부를 찌르곤 했다.
그 횡령 사건보다 작지 않은 죄가 어디 한 둘이겠는가. 분分과 초秒를 다투는 심각한 순간에 하필이면 부끄러운 기억이 툭 떨어진 걸까. 차라리 정직하게 고백하고 따끔하게 벌을 받았더라면 벌써 잊어버리고 말았을 장면이다. 용서받지 못한 죄가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어 오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赦해지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심근경색이라며 곧바로 수술실로 옮긴다. “마취합니다. 소리 들립니까?” 반복하는 집도의의 목소리가 잦아들 즈음에, 고해의 말이 입 속에서 맴을 돈다.
“부디 정직하지 못했던 저를 용서해 주 십 시 오…….”
'수필세상 > 좋은수필 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벽지 속으로 머리를 집어 넣었다 / 홍정현 (0) | 2018.10.08 |
---|---|
[좋은수필]말하고 싶은 눈 / 반숙자 (0) | 2018.10.07 |
[좋은수필]사고뭉치 / 김이랑 (0) | 2018.10.05 |
[좋은수필]가풍(家風) / 김우현 (0) | 2018.10.04 |
[좋은수필]보물 / 정근식 (0) | 2018.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