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증후군 / 조이섭
설날이 다가오니 텔레비전 프로그램마다 명절증후군을 주제로 토크쇼가 만발이다. 멀쩡하게 생긴 여성들이 시댁 이야기만 나오면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것이 우습다 못해 처연하기 까지 하다. 우리 며느리들이 볼까 봐 겁이 난다.
몇 해 전만 해도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친정에 일찍 안 보내 준다고 난리더니, 이번 초대 손님들은 명절날 친정에 먼저 가는 게 무슨 큰일이냐고 반문이다. 딸은 왜 빨리 안 오느냐 조바심내면서 며느리는 붙잡아 두는 시어머니의 심보를 야멸차게 공격하던 여성토론자에게 사회자가 질문을 한다.
“변호사님의 아들이 장가가서 명절에 처가에 먼저 들렀다가 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까? 우리 아들이 그랬다가는 당장 호적을 파 버릴 겁니다.”
초대 손님으로 나온 여자 변호사는 처가에 가겠다는 말을 하는 자기 아들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얼굴이 벌게져서 불끈 쥔 주먹을 부르르 떤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다.
아내는 설 대목에 평소와 달리 재래시장에 다녀온다, 내가 차남이라, 집에서 차례 음식을 장만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텅 비어 있던 냉장고에 갖가지 반찬이랑 과일을 구색 맞춰 채우느라 분주하다. 순전히 명절 쇠러 오는 며느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윽고 불똥이 나에게도 떨어진다. 집 안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하라며 청소기를 쥐여 주더니 밀대까지 내밀며 바닥을 닦으라고 한다. 그 뿐인가. 아이들이 머물 방의 티브이며 책상과 컴퓨터를 닦으라지를 않나, 손주 녀석들이 갖고 놀 장난감까지 깨끗하게 먼지를 털라고 내놓는다.
“이 사람아, 학교에 장학사가 방문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난리 부르스고? 장학사가 아니라 교육감 오는 것 같다.” 라고 타박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걸레질을 하는 팔에 힘이 들어간다.
작은 설날 오후에 둘째 아들 식구가 손자를 앞세우고 들어선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작은며느리가 “뭐 할 일 없어요?” 하며 제법 티 나게 부른 배를 앞세우고 주방으로 들어간다. 아내가 질겁하면서 며느리 등을 떠민다.
“야가 와 이카노, 배를 불룩하게 해 가지고. 어서 편하게 앉거나 소파에 누워라.”
며느리가 나에게 묻는다.
“아버님, 형님은 오늘도 일하세요?”
“그래, 오늘 오전에 근무하고, 오후에는 친정에 가서 차례 음식 준비하고 저녁이나 돼야 올 거야.”
큰며느리는 연전에 친정어머니를 여의었다. 남동생이 아직 성가(成家)를 하지 않아서 바깥사돈이 차례 음식 준비하는 것이 어렵지 싶어서 며칠 전에 며느리더러 그리하라고 일러두었던 터였다.
늦은 저녁에, 큰아들 내외가 쌍둥이를 데리고 들어온다. 한복을 입고 아장아장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 선녀가 따로 없다. 눈이 사르르 녹는다. 보조 의자까지 동원해서 온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는다. 둘째가 포항에서 가져온 과메기 상자를 열어보니 과메기, 김, 생미역, 초장, 된장, 야채, 마늘, 풋고추까지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다. 생선회를 못 먹는 큰며느리에게 말을 건넨다.
“과메기는 먹어 봤나?”
“아니, 안 먹어 봤어요.”
“과메기는 초장을 듬뿍 찍어서 김하고 미역하고 싸 묵는 기다.”
며느리는 시키는 대로 과메기를 싸서 입에 넣는다.
“아버님, 비린내가 생각보다 많이 안 나는데요?”
이번에는 등심을 구울 차례다. 고기를 굽는 것은 내 담당이다. 고기를 구워 식탁에 나르면 아이들은 가위로 고기를 잘라 먹는다. 짬짬이 큰며느리, 작은 며느리가 고기쌈을 싸서 고기를 굽고 있는 시아버지 입에다 넣어 준다.
“너거 아버지는 저 재미로 맨날 고기는 자기가 굽는다 칸다.”
식사를 마치고 큰아들 내외와 쌍둥이가 미리 세배를 한다. 내일 아침 큰며느리가 친정으로 바로 가기 때문에 하루 당겨서 하는 세배다. 엉덩이가 하늘을 향해 치솟는 엉터리 절이지만, 쌍둥이의 첫 세배를 받고 보니 기분이 좋다. 복주머니에 세뱃돈을 넣어 주고 쌍둥이를 양 무릎에 앉혀 놓고 보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설날이다. 둘째 내외가 손자와 함께 세배를 한다. 손자에게 세뱃돈을 주고 “올해는 혼자 어린이집에 잘 가고, 동생이 태어나면 예뻐해 주라.”는 덕담을 마치고 큰집으로 향한다.
대구에 있는 친척 집 네 군데를 돌며 차례를 지내야 한다. 큰집에는 조카들이 모두 모여 있다. 차례 음식을 차리고 있는 곳을 건너다보니 며느리가 앉아서 일손을 거들고 있다 “질부들, 포항 며느리는 배부르다. 일을 시키지 마라.” 했더니 모두 깔깔 웃는다. 손자가 보챈다는 핑계로 큰집 차례만 지내고 둘째 아들 내외를 우리 집으로 보낸다.
우리 부부가 나머지 친척집을 돌며 차례를 지내고 집에 돌아오니 오후 두 시다. 아들, 며느리, 손자가 자고 있다. 새벽에 손자가 깨어 울면서 보채더니 피곤한 모양이다. 그 사이에 아내는 밥을 새로 하고 미리 만들어 놓았던 반찬을 차려낸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사과를 깎아 쟁반에 담아낸다. 아내가 며느리더러 친정에 갈 준비를 하라고 해도 천천히 가도 된다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해거름이 되어서야 집을 나선다. 양손에는 아내가 만든 밑반찬 보퉁이가 들려 있다.
아내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한다.
“아이고, 이제 설 다 지나갔네. 이러다 내 몸에 사리 생기는 거 아닌지 몰라.”
명절에는 아무래도 아내가 제일 힘이 드는 것 같다. 우리 며느리들이야 시댁에 와서 먹고 가는 일밖에 없으니 명절증후군이 생길 턱이 없다. 친정엄마 여읜 큰며느리는 설 전날부터 친정에 보내주지, 배부른 며느리는 설거지도 안 시키지. 거기다 시아버지가 고기 구워주지, 과일 깎아 주지. 세상에 이런 시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손주들이 어질러 놓은 집 안 청소나 미처 못 한 부엌 설거지도 우리 부부 차지다. 그런데도 며느리들이 친정집에 들어서며 하는 말이 환청처럼 들린다.
“아이고, 이제 살겠다. 시댁 갔다 왔더니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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