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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운 좋은 날 / 장규섭

 

운 좋은 날 / 장규섭


 

 

"그거 어디에다 쓰게?" 버리기엔 아까워 이삭처럼 주워온 고구마를 남편은 먹지도 못할 잔챙이라며 타박이다. 작지만 함부로 버리자니 누군가에게 죄를 짓는 것 같기도 하여 알뜰히 주워온 늦사리다.

"짚신장이 헌 짚신 신듯," 농사짓는 사람은 실한 것을 먹을 수가 없다. 고구마도 마찬가지다. 굵은 것은 가려두고 상처가 난 것과 잔챙이는 미리 손질해 두어야 썩지 않고 허비를 막을 수 있다. 큰 고구마는 널어두고 작은 것만 가져와 도랑에서 흙을 씻어 낼 참이었다.

집 앞 도랑은 인공수로이긴 하지만 제법 물소리를 내며 쉼 없이 흘렀는데 소리가 없다. 이상하여 들여다보니 물이 거의 마르다시피 하다. 이 난처함을 어쩐담. 번거롭더라도 차라리 시골집에서 미리 씻어올 것을. 난데없이 미리 예견하지 못한 허물이 내 속에서 울컥 올라온다.

지난번에는 흙 묻은 땅콩을 소쿠리에 담아 수월하게 씻었다. 그때처럼 흐르는 물에 말끔하게 씻어볼 요량이었는데 참 난감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데 허공에서 남편의 고소해 하는 비아냥거림이 환청이 되어 울린다.

잔챙이는 맛이 없다.”는 것을 우격다짐으로 챙겨온 고구마다. 작고 앙증스러운 것도 살짝 쪄서 말리면 쫀득하고 달큰한 간식이 될 수 있는데. 정성으로 가꾸던 농심은 어디 가고 잔챙이라고 야멸스레 외면할까. 하는 수 없이 무모한 짓인 줄 알면서도 수로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고인 물이 없는지 살핀다.

얼마 되지 않는 잔챙이를 씻을 물, 정도야 없으랴 하며 수로를 따라가는데 푸른 지폐가 보란 듯이 나의 눈길을 당기는 게 아닌가. 깊은 수로에 뜻밖의 돈이 떨어져 있다니 눈이 절로 슴뻑여 진다. 무거운 수로 덮개를 빼내기도 어렵고 당장 돈을 꺼낼 수 있는 얕은 곳도 아니다.

은근히 가짜가 아닐까라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복사기술이 뛰어나 수중에 들어오지 않는 한 단언하기 어렵지만 수로 덮개를 먼저 들어내어야 한다는 용기가 앞선다. 물이 많은 곳을 찾다 말고 빨리 돈을 꺼내야 한다는 속물근성이 작용해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무거운 수로 덮개를 들어 올리려면 손을 보호할 수 있는 장갑이라도 가져와야 한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도 모르게 은근슬쩍 돈이 좋아서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어렸을 적, 꿈속에서 동전을 많이 주워 달뜨던 마음이 지금도 어린다. 푸슬푸슬한 검은 흙더미에서 삐죽 나온 동전 몇 닢을 줍고 나면 흙이 조금씩 허물어져 내렸다. 그사이 동전이 또 빵긋 보이고, 줍고 나면 또 흘러내려 보이고, 치마에 주워 담아도 끝이 없었다. 놀부 심보처럼 덩달아 커진 욕심을 누군가 훔쳐보지 않을까 조바심하다 그만 꿈이 달아나 버렸다. 비록 꿈속이었지만 돈에 대한 환상은 어린아이도 빠져들게 하는 묘한 여운이 지금도 선하다.

집에 돌아온 후 남편에게 수로에 물이 흐르지 않아 고구마를 씻을 수 없다는 얘기를 했다. 멀뚱히 듣고 있던 남편은 산 쪽에서 뻗어 나온 큰 도랑에 물이 있다는 게 아닌가. 흐르는 물이 없어 답답하던 마음이 금새 환해진다. 수로에서 흙 고구마를 씻으려 했던 예상이 빗나가고 잠깐 실망스러웠던 마음도 반전되니 그것 또한 돈 못지않은 기분 좋은 일이다.

아직 확인 안 된 파란 돈이지만 뭇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수로에서 내 눈에 띈 것도 분명 뜻밖이다. 만약 진짜 돈이라면 고구마를 씻는 것에 따르는 부수적인 요행까지 겹치는 행운이 아닌가. 전날 고구마를 캐느라 피곤하던 몸이었지만 물이 없어 답답하던 마음이 한결 가뿐하다.

남편도 덩달아 좋은 느낌이었는지 미리 준비해 놓았던 손수레를 끌고 앞서 간다. 딴엔 들뜬 마음으로 다가서는데 자리표시를 해 두었던 자전거가 사라져 버렸다. 둘이서 허리까지 굽혀가며 자전거가 세워져 있던 주변 자리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무거운 수로 덮개를 끌어내고 남편이 주워낸 것은 은근한 예감대로 진짜 돈이다. 아마 해거름에 주변 밭에서 농작물을 가꾸고 귀가하는 농부의 안타까운 실수였을까. 뜻밖의 불로소득을 손에 쥐었지만 잃은 사람의 마음이 떠올라 기분이 미묘하게 느껴진다.

양쪽 채소밭 사이로 뻗은 도랑에도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 찰박거릴 정도로 흐른다.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 수로에 물이 흐르지 않는 것은 못물을 가두기 위해 수문을 막아둔 모양이다. 보이지 않던 물도 많겠다, 불로소득에다 투명한 가을 햇살까지 덤으로 받으며 가슴속엔 행운의 여신을 품고 엎어놓은 양동이에 엉덩이를 걸쳤다.

흥얼거리는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이 잔챙이 고구마를 씻는 내 모습이 안돼 보이는지 그 작은 고구마를 씻어 뭐 하게요?” 하며 한마디씩 뱉는다. 그들의 눈에는 먹지도 못할 잔챙이 고구마를 씻느라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것쯤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상치를 한 움큼 잡은 아주머니도 사료 포대 손수레를 끌고 축사 쪽으로 올라가던 아주머니도 길을 멈춘다. 요리재료로 쓰이는 오리지널 녹말을 만든다는 말에 이구동성으로 말꼬리를 잡는다. 밭에서 무언가를 하던 아저씨도 나와서 말을 보태며 아예 도랑둑에 걸터앉는다.

작아서 먹기 곤란한 고구마나 감자를 갈아서 나달 가량 물에 담가 우려낸다. 시커먼 물 색깔이 옅어질 때까지 우려낸 다음 앙금을 걸러 시원한 곳에서 말린다. 조금 건조되면 손질하기 좋을 때 덩어리를 잘게 떼어 놓으면 한결 잘 마르고 갈기 쉽다. 분쇄기에서 보드랍게 갈아 채에 내리면 음식재료에 용이하게 쓰일 고구마 녹말이 되는 것이다. 상처 난 고구마도 적당한 두께로 썰어 살짝 쪄서 말리면 푼푼한 주전부리요 씹을 때 쫀득한 식감은 심심풀이 땅콩이나 진배없다.

물이 없어 애타던 마음도 주거니 받거니 대화의 물꼬를 트고 나니 마음의 갈증도 시원하게 풀리고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잔챙이라 손이 좀 가긴 하지만 녹말도 얻고 버릴 것 없이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생활의 지혜요 덤이다. 옛날 우물가에 모여서 수다 떨던 여인들처럼 투명한 가을 햇살 속에서 낯선 사람과 나누었던 담소도 자연 속에서 얻어진 삶의 정겨운 모습이다.

물속에서 노닐듯 옹색하게 지절대며 일손을 마치고 보니 일상 속에서 느끼지 못하는 일들이 다 덤이고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라지 못할 복권당첨만이 행운이 아니라는 것을 운 좋은 날의 일진이 대변해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