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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평화 / 강대선

평화 / 강대선  

 

 

 

갑자기 닥친 뇌출혈이었다. 수술실로 향하기 전 중환자실에서 만난 그녀는 병든 짐승처럼 허약해 보였다. 눈을 감고 묻는 말에 가끔 끄덕이는 턱에서는 예전의 그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젊은 의사는 수술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최악의 가정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끔 그 여자의 피붙이들이 쏟아놓는 울음들을, 한 박자 기다렸다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그 말 속에 들어 있는 상상의 칼날들이 잘라내는 감정의 울부짖음 따위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는 듯 그는 긴 손가락을 몇 번 두드려가면서, 혹은 애써 모른 척하며, 동그라미와 밑줄과 보충설명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그 진땀어린 설명의 꼬리에 수술동의서를 내밀었다.

작은형의 눈은 이미 울음으로 얼룩져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밖으러 나가버렸다. 의사는 수술동의서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그 여자가 준 이름 석자를 그 여자를 위해 네모 칸에 집어넣었다. 달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그녀에게 간단한 수술이라고 말하였다. 아마도 다섯 시간은 족히 걸릴 수도 있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잘못하면 영영 잘못될 수도 있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그리고 또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 수 있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눈이 멀고 한쪽 몸이 마비되어 일어서지 못할지 모르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영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말의 머리와 몸통은 모두 자르고 '간단한 수술'이라는 말에만 힘을 주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그 순간이 그녀와 살아오면서 만난 너무나 짧고도 무척이나 긴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한텐 기다리고 기도라는 일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았다. 수술 중이란 단어가 뜬 전광판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는 그림자들 사이로 한숨과 눈물과 흐느낌의 소리가 버무려지고 있는 오후 4. 대기실에서 중년의 한 여자가 나를 대신하여 곡비처럼 울어주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설움 비슷한 무엇인가가 올라와 울컥거리고 있었다. 석양을 바라보며 끼룩거리는 갈매기처럼 우는 모습이 슬픔의 층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 슬픔의 층 속에 앉아 나는 묘한 슬픔과 위안을 얻고 있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울었다. 그 여인의 울음은 나의 것이기도 했다. 나의 울음, 나의 통곡, 나의 무너짐이었다. 하지만 난 견디어내고 있었다. 가슴에서 계속 뭔가가 치고 올라왔지만 내가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란 참아내는 것이며 차분히 기다리는 일이며 강해지는 일이라며 스스로를 다짐시켰다. 지금 무너지면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더 이상의 기다림을 참을 수 없을 때 나는 1층 로비로 내려갔다. 그리고 커피를 찾았다. 중독성 지닌 검은 액체를 목구멍으로 차갑게 넘겼다. 지나간 숱한 날들 동안 그녀는 나의 뼈였고 나의 살이었고 나의 깃털이었다. 회전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햇살은 따갑게 거리를 달구고 있었다. 가로수 사이로 비둘기가 날고 현관 분수가 허공으로 튀어 올라다가 떨어져내렸다. 분수 너머로는 택시들이 손님을 태우기 위해 정지된 화면처럼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기다리다 지친 택시 기사 몇몇이 문을 열고 나와 담배를 한껏 빨아댔고 내 눈은 그들이 모습을 빨아대고 있었다. 니코틴 냄새가 위안처럼 나에게 넘어왔다.

의사 서너 명이 커피를 입에 물고 뭔가를 중얼거리고 지나가는 모습이 먼 세상의 그림자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흰 가운이 잠시 햇살에 일렁거렸을까. 문득 하얀 깃털이 하늘을 빙빙 돌다가 흰 구름이 되었다가 백조가 날아올랐다. 그 백조가 다시 하강하더니 뾰족한 부리로 내 눈을 쏘아댄다. 눈에서 이슬 몇 방울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핸드폰이 울렸다. 수술이 끝났다.

수술실에서 실려 나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괴로움으로 몸을 뒤틀고 있었다. 침대에서 몸부림치는 그녀가 날 낳았을 것이고 저 간절한 튀틀림의 고통이 날 낳았을 것이다. 가슴을 빠개고 들어서는 숱한 기억들의 파편들이 고스란히 밀려들었다. 뼈만 남은 한 여인이, 가련한 목숨의 한 가닥을 부여잡고 싶은 한 여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네 에미다.' 그녀가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당신을 세상 무엇에 댈 수 있단 말입니까. 깃털보다 가벼울 것 같은 당신의 어깨가 저를 안아 길렀으며 가녀린 당신의 팔과 다리가 저를 먹이고 입혔습니다.'

다시 중환자실로 들어간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 나는 침묵의 깊은 갱도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마른 침이 고였을까. 의자에 앉아 의사의 콜을 기다리는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크고 거대한 절대자의 부름을 기다리는 심정이 되어 기도를 했다. '제발 살려만 주세요. 그 다음은 마음대로 하세요.'

다시 대기실에서 30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간호사에게 주의사항을 듣고 다시 30분을 앉아 있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기 전에 소독기에 손을 씻었다. 손을 씻는 짧은 시간에 문득 불효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자구 안에서 배운 가장 순하디 순한 언어들은 지금 얼마나 더렵혀져 있는가. 내 안에 있는 언어들이 거짓과 헛됨과 욕망의 세균들이 득실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는 손을 소독하는 일처럼 나를 소독하고 싶었다. 뼛속까지 순해지고 싶었다.

그녀의 육체에 꽂힌 주사바늘과 매달린 링겔과 침대에 매달아놓은 산소호흡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녀린 숨소리조차 마취된 듯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침묵 한 점을 떼어 그녀 옆에 기념비처럼 세워놓았다. '살아줘서 고마워요.' 그녀의 가녀린 숨소리가 맥박을 되찾고 있었다. 그 소리에 뼈도 살도 깃털도 섞여 들었다. 머지않아 그녀가 예전처럼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한 줌의 숨이 저 한 줌의 맥박이 태초의 생명으로부터 나한테 건너왔을 것이다.

큰 고비 하나는 넘은 것이다. 간호사는 앞으로도 많은 고비들이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다시 그녀와 나의 내일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평화로웠다.